시류를 찾아
1년간 세상과 단절되어 지냈습니다. 전자사전도 반입되지 않는 곳이라 모르는 단어는 종이사전으로 찾고, 오락거리라곤 계단에 앉아 읽는 신문들이 전부인 곳이었죠. 세상과 단절되어 있던 이 1년간 세상은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1년 만에 나온 세상에서 사람들은 ‘에어팟’이라는 걸 착용하고 있었고, 오랜만에 틀어본 TV 프로는 저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물론 1년 만의 변화라고는 할 수 없을 겁니다. 어릴 적에는 개그 프로나 예능만 봤지, 뉴스에 흥미를 느낀 건 처음이니깐요. 흔히들 '아빠 안 잔다'의 뉴스 이미지는 웅장한 음악과 함께 시작하는 딱딱함이 다반사이지만, 제 눈에 들어온 것은 심각하고 진지한 표정의 아나운서가 단독으로 진행하는 그런 뉴스가 아녔습니다. 시청자들이 따분해하지 않기 위해 해설은 줄였고, 시사프로는 젊고 근심 없는 어조, 태평하고 가벼운 어조로 이어지는 토크쇼화 되었습니다. 작정하고 조금 더 젊고, 더 가벼워지기로 한 뉴스였습니다
“이제는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는 시대가 아니라 빠른 물고기가 느린 물고기를 이기는 시대로 바뀌었다.
빠른 물고기라고 한다면 '몸집이 작아 날쌤'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클라우드 슈밥의 이 말은 단지 작은 몸집에 대한 무한 긍정이라고만 생각되진 않습니다. 사실 몸집이라는 건 통제 변인에 더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모든 조건을 동일하다는 가정하에 스피드란 자신을 넘어선 외부에 의해 결정이 되곤 합니다. 그 대상이 물고기라면 물의 흐름을 얼마나 잘 이용하는지, 모든 구간에서 최고의 힘을 낼 수는 없으니 강약 조절을 얼마나 잘하는지 등이 스피드를 결정합니다. 주변의 힘이 자신의 스피드에 편승하게 하는 능력, 이것이 클라우드 슈밥이 말하는 스피드란 이런 것일 겁니다. 재능과 운의 비중이 큰 물고기가 이기는 단순한 게임은 끝났습니다. 21세기는 노력으로써, 조금 더 기민하게 움직이는 물고기가 이기는 게임입니다.
국가든 기업이든 개인이든 지금부터는 스피드 역량이 생존 여부를 결정합니다. 물고기에겐 물의 흐름이 중요하듯 우리에겐 시류 즉, 시대의 흐름이 중요합니다. 그 흐름에 계속 올라타 있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전제되는데. 먼저 그 내용이 어떻든 그것에 의문을 품지 말아야 할 것. 둘째, 오늘의 흐름과 내일의 흐름은 다르니 언제나 일시적 배반에 가담해야 할 것 이 두 가지입니다. 역설적이지만 흐름에 대한 일말의 의심은 금물이지만 동시에 충실한 배반이 요구됩니다. 한편, '배반'이라는 단어는 긍정적 의미보단 부정적 의미를 많이 함의하고 있긴 합니다만, 이미 우리 삶은 매 순간 해체와 동시에 건설을 진행 중입니다. 따라서 '배반'이란 해체의 이중적 의미를 동시에 가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배반'은 은연중에 너무나도 자연스레 진행되고 있고요.
현대의 시류 : 가벼움
'가벼움'은 지금 이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입니다.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뉴스까지도 젊고 가벼움을 도모한다는 것은 시류가 그쪽으로 흘러간다는 것이겠죠. 콘텐츠들의 향연인 유튜브만을 보더라도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영상들이 쏟아지지만 수많은 영상 중 시청자들의 선택을 받는 쪽은 더 짧고, 가벼운 쪽입니다. 비록 알찬 내용일지라도, 긴 해설과 더불어 단조로운 어조는 사람들에게 지루한 대학 강의로만 여겨질 뿐이죠. 이처럼 단순히 많이 안다고, 혹은 남들보다 많은 경험을 무기로 살아가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새로운 뉴스를 본다는 것이나 유튜브 영상을 보는 것, 그건 인스턴트 음식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빠르게 먹고 금세 잊어버리는.
특유의 가벼움과 톡톡 튀는 아이디어는 젊은이들의 전유물입니다. 그들의 제2의 천성과 같죠. 가벼움과 특유의 재잘거림은 진지하고 무거운 것들의 해체를 가속화합니다. 이로 인해 더 이상의 진지한 무언가의 설 자리는 좁아지고 있습니다. 분명 예전에는 통했는데 말이죠. 뉴스를 보다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한 적이 있었는데 이는 빠르게 움직이는 물고기들에 관한 기사였습니다. 기사의 내용은 리버스 멘토링(Reverse Mentoring), 기성세대가 MZ세대와 동행하며 그들의 사고방식을 배운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멘토링의 개념과는 달랐습니다. 아마 처음부터 이러한 형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점쟁이를 찾는 5060
처음엔 윗세대들이 마치 소심한 학생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선생님을 자처하였으나 이제는 서로의 역할이 바뀌었습니다. 소비층은 점점 더 가벼움을 추구하게 되고, 기성세대가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 선생님을 자처했던 기성세대는 점점 스스로 자신감을 잃어 지혜를 찾고자 점쟁이를 찾는 어른들로 변해갑니다.
점쟁이를 찾아가는 사람들은 점쟁이의 지혜가 대단하길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점쟁이가 외부의 어떤 지혜 창고와 보이지 않는 관으로 연결되어 있길 바랄 뿐이죠. 뉴스를 보는 와중 MZ세대가 하는 놀이를 함께 하는 기성세대를 보는 저는 전혀 그들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이는 아름다운 물고기 같아 보였습니다. 물론 기성세대에겐 MZ세대의 사고가 낯설기도 하고 의미 없는 재잘거림으로 비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빠른 물고기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철저한 배반이 요구되죠. 애석하게도 기성세대에게 요구되는 자세는 가벼움과 재잘거림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