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곤 May 22. 2022

자상하지만 다정하진 않습니다

검정(Black)


"저의 꿈은 착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동기의 수업시연 시간이다. 이 시간엔 자리에 앉은 모든 예비교사들이 초등학교 1학년이 되어 수업에 참여하게 된다.


 "저의 꿈은 착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착하지 않은  자신에게 많이 실망을 했기 때문입니다." 단지 초등학생을 흉내내기 위하여, 혹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이러한 간단한 꿈을 내세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절절하다 못해 절실한 바람일뿐이다. '착하다'라는 단어 하나로 내가 원하는 것을 표현할  있을진 모르겠다. 하지만 마음  깊은 어딘가로부터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음은 분명하다. 바닷물을 마신 양 끊임없이 느끼는 이 갈증을 말이다.


 '착하다'에 대한 갈증은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나르키소스>(Narcissus), 110cm X 92 cm, 1597-1599



"저는 남들보다 똑똑하지도 글을 잘 쓰지도 못합니다. 단지, 남들보다 조금 조숙할 뿐입니다."


 브런치 작가 신청서의 자기소개서의 시작 부분이다. 나에게 조숙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준비.. 시작! 하고 남들과 똑같이 받은 흰 도와지를 너무 빨리 채워버린 것이 아닐까? 빠르게 채워 넣음도 모자라 여러 색을 덧칠하다 보면 온 도화지가 검은색으로 흥건하다. 빛을 충분히 감상하기도 전에 너무나도 일찍 어둠에 익숙해진 것은 아닌지, 어쩌면 마음의 창이 서쪽으로 나버린 탓에 해가 지는 서쪽 하늘만을 바라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검정 물빛이 무서운 이유는 주변의 모든 것을 흡수해 버린다는 것이다. 검은색으로 가득 찬 도화지에 다른 색을 채우려고 할 때마다 자꾸만 밤보다 깊은 검은 물빛이 더욱 깊어져만 간다.


 나에게 검정이란 정렬의 불꽃의 고유한 색이다. 이 춤추는 듯한 검정 물빛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형태는 정형화되지 않은 검정 불꽃이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여느 제단의 불꽃처럼 그 위에 올라온 모든 것을 태워버리곤, 잘 타올랐던 불꽃이 때깔 좋은 숯을 남기듯 시커먼 숯만 계속 만들어낼 뿐이다. 이 무의미한 일을 왜 계속 반복하는가. 그것은 무언가를 깊이 갈망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검은 물빛 속에서 밤새도록 춤출 수 있는 그것을 말이다.





 모든 것이 잠겨버리는 이 깊은 어둠 속에서 조명이 켜진다. 분명 깊은 어둠은 빛을 향해 나아가고는 있지만 그 경계는 매우 불분명하다. 색의 입자를 하나하나 더듬더라도 날카로운 경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건이 벌어질 것만 같은 느낌’은 숨길 수 없다. 위 그림, <나르키소스>로 눈길을 돌리면 물가에 앉아 있는 남자의 위치는 연극무대 위인 것 같기도 하다. 진정한 자신은 철저히 배제한 채, 이 무대에 맞는 자신을 열연하는 듯 말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위의 '나'가 진정한 자신인지, 아래의 흐릿한 '나'가 제 모습인지 헷갈린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결정적으로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그림 속 주인공의 위치가 달라짐에 따라 그림의 감상자의 위치 또한 동시에 달라진다. 가령 아래쪽의 '나'가 위를 연기한다면 감상자의 위치는 이 무대를 보고 있는 관객석 쪽에 가깝지만. 반대로 위쪽의 '나'가 아래쪽의 남자를 연기하는 것이라면 관객의 위치는 위의 ‘나'가 연기하는 남자 바로 옆일 것이다.


 "두 명의 나르키소스 중에서 누가 진정한 나르키소스인가?"


 누가 진정한 나르키소스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신화 속 나르키소스는 물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움에 반한 나머지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그 모습을 보다가, 물속으로 뛰어들어 그만 수선화가 되었다는 것이 더 중요한 내용이 아닐까? 남자의 괴로운 표정을 보고 있자니 수선화가 되어버릴 자신의 운명을 짐짓 예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형태가 어떻게 되든 어둠이란 빛을 도드라지게 만들고 그로 인해 무대 위에서 최고로 빛날 수 있게 도와주는 최고의 연출자이다.


"저의 꿈은 착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야 왜 영원의 불꽃을 태우는지 알 것 같다. 이 도와지의 칠흑 같은 어둠은 왜 계속 깊어져만 가는지를. 그것은 마음속 한 켠이 한줄기의 빛을 갈망하고 있다는 신호이지 않을까? 이 영원한 어둠 속의 구원과 같은 빛을 말이다. 동시에 조명이 켜지고 연극이 시작되길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착하다'는 빛의 여러 스펙트럼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완벽한 빛을 갈망하는 행위 자체가 심연의 어둠 속으로,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는 행위일텐데. 다만, ‘어둠이 깊어질수록 빛의 도드라진다’ 이 한가지는 자명한 사실이다. 모든 것을 삼켜버릴 어둠조차도 구원을 절실히 바라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상하지만 다정하진 않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