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유적(幽寂)하다. -3 종결. 마지막화

서서히 윤곽이 드러났을 때 그제야 그녀가 누군지 비로소 알아볼 수가 ..

by 이규만

영화에서는 토토가 첫사랑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한 채 군대 간다. 군 복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그를 알프레드 아저씨는 그렇게 달가워하지 않는다. 성공할 때까지 절대 찾아오지 마라. 현대사회의 극장은 멀티미디어의 발달로 사향 길에 접어든다. 극장은 낡고 오래된 박물관으로 변한다. 극장이 막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문을 닫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산업이 최첨단을 다룰수록 토토는 점점 외로워진다.

좀 전에 쳐다보았던 태양과의 싸움에 져 두 번씩이나 샤워했다. 아침밥과 점심밥 먹는 중간쯤에 한 번. 오후, 네 시에 새참을 먹고 난 후에 또 한 번. 그래도 고급 테니스장인지 샤워장이 있어 다행이었다. 산다는 게 참 고달프고 고통스러웠다. 젊은 나이에 이 주책없는 몸뚱이조차 건사 못해 당하는 수난이었다. 여름도 막바지이고 매미 소리도 한풀 꺾여 가는데 뜨거운 햇살은 가실 줄을 몰랐다. 날씨가 너무 더워 그늘에 풀썩 주저앉아 담배를 피우는 중간, 중간에 같이 일하는 남자와 예전 직업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는 몹시도 후회했다. 돌아갈 수 없었던 건 자존심 때문이야. 당장은 먹고살아야 하잖아. 그래서 이 길로 뛰어들었지.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도 돌아보았다. 내 나이가 스물여섯이 되던 해. -뭔가 결판나리라 예견하면서 되는대로 지냈다. 되는대로 지냈다는 것은 이 생활이 맞지 않았고 바뀔 계기가 나타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고 낌새조차 없었다.

주위의 것들은 바뀌어 갔다. 나는 가만히 멈추어져 있는 것 같았고 빠른 변화에 대한 것들이 나를 한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계속 두려움과 초조가 밀려들었다. 갖가지 생각이 오갔다. 곧 죽음이라는 실체에 서서히 근접하고 있음을 느꼈다. 급기야는 그것들을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직전까지 갔다. 청산가리를 입안에 털어 넣고 목구멍에 걸려든 쓰디쓴 약을 훌훌 넘기고 수초만 꾹 참는다던가. 아파트 같은 높은 건물에 올라가서 새가 비행하듯 세상을 향해 몸을 던지고 바람을 가르다 땅바닥에 툭 떨어져 충격을 온몸으로 감싸 안는.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고 그 수초 간에 참는 고통도 갖가지이지만 잠깐을 견뎌내기 위한 처절한 용기는 내게 없었다. 실지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어이없는 사태에 이르렀다. 한없이 머리를 흔들었다. 이건 정말 아니다. 정말 아니라고.

이 세상이 끝나는 운명의 막장이 휘몰아쳤다. 내 생애가 끝나면 모든 이 세상이 끝난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 세상의 과거가 존재했다. 다른 삶이 사고사나 병고로 죽거나 안락사로 끝났던 일련의 사건들도 이어졌다. 앞으로 어떤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무수한 기대나 희망들은 내가 죽고 나면 전혀 알 수가 없고 또한 이 세상이 존재한 여부조차 모른다.

집에 돌아온 나를 본 아버지와 어머니는 열이 펄펄 달아오른 내 모습에 걱정해 주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서 안타까움으로 변해 버린 한숨 섞인 말들이 더 많았다. 온몸이 안 쑤신 데가 없었다. 당장 겉으로 드러난 보인 러닝셔츠 모양대로 타버린 살갗이 문제였다. 그냥 있어도 너무나 따가운 데 잠을 자다가 뒤로 돌아누우면 바닥에 살갗이 닿아 시리기까지 한 아픔이 몇 번씩 잠을 깨우기도 하였다. 손을 다쳤을 때의 처음 며칠간의 병원 생활이 떠올랐다. 그러한 모습에 어머니는 안타까운지 계속 주절이었다. 미련하기는. 일할 때 더우면 반소매 티셔츠라도 입고하지. 일 나가지 마. 내 마음은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한 타성에 젖어 우울함을 달랠 길이 없었다. 그렇게 찌그러져 있는데 오랜만에 같이 한 저녁 자리에서 아버지는 몸이 나아졌나 물었다. 곧이어 느릿느릿 아버지의 말이 이어졌다.

“그게 다 소설의 재료가 되는 거야. 글 이란 건 소중한 체험에서 써질 때가 많으니까.”

아주 잠깐이지만 뭉클하니 가슴에 와닿았다. 하지만 이내 수그러져 처해 있는 상황이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아버지는 아직도 믿으세요?”

“뭘 말이냐?”

“제가 다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믿으나 안 믿으나 마찬가지 아니냐? 누가 뭐라 하든 간에 어딜 가나 네가 내 아들이고 가족임이 틀림없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너에게 뭘 하라고 강요하지 않겠다. 급하게 서둘러서 일자리를 구해서 돈을 벌어 오라는 것도 아니다. 취직을 했다, 해도 보수가 적으니 많으니 우위를 가리려는 것은 더욱 아니야. 이야기를 들어봐. 너 그거 아니?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는 언제 문명을 떨쳤는지 아니? 오십이 훨씬 넘어서 육십이 가까워진 나이 때였어. 세상을 비웃듯이 풍자적으로 묘사한 돈키호테 하나로 말이야. 그것도 전쟁포로로 붙잡혀서 감옥에서 쓴 소설이야. 포로로 잡혔을 때 다른 동료들은 절망할 때 그는 기회라고 생각했지. 언젠가 자리 잡을 때가 오는 것처럼 글이라는 것도 잠시 체험으로 묻어 두다가 나이를 많이 먹어도 쓸 수 있는 거잖아.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라. 물론 그때 가서도 아무것도 쓸 수 있는 것이 없다면 할 수 없는 거지만 말이다.”

아버지가 내 비사를 약간은 미화시킨 부분이기는 하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때 수필을 써서 상을 받고 그 글이 활자화되어 교지에 실리고, 무슨 단체에서인가 상을 받고, 나를 아는 사람으로부터 조금 알려지고 하던 때를 기억해 낸 것이다.

많은 공부를 해야 했고 많은 것을 경험하고 숨죽이고 끈질기게 기다리는 줄 알아야 했었다. 따로 문학 수업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특별하게 일러주는 선생님도 없었다. 나름의 정열만 가지고 써낸 글들이 성공을 거두었다면 랭보 같은 천재적 작가가 되었을 것이다. 한동안 한 줄의 글도 쓰지 않으면서 소설을 써보겠다는 목표는 영원히 채근 질만 하는 평생의 일일 뿐이다.


한동안 날씨가 좋았다. 귀가 먹먹하게 울릴 정도로 울어 대던 매미 소리도 그친 지 오래다. 잠자리가 공중으로 붕붕 떠다니는 사이로 남한산성 순환도로가 보이고 쭉 이어진 도로 끝으로 황송터널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다. 밤이 되면 또 하나의 풍경을 연출했다. 꺾어져 돌아간 순환도로 다리 위로 가로등 불빛이 비쳤다. 제법 운치가 있어 보였다. 완공은 된 것 같은데 아직 개통은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우여곡절이 많은 도로였다. 아파트 경비원한테 들었다. 한창 공사가 진행하고 있을 때 그러니까 산 반대편에 사는 은행주공아파트에 주민들이 시에 진정서를 제출하여 공사를 중단시켰다. 공사로 인하여 아파트 건물에 금이 가고 있고 아파트를 빨리 노화시키는데 터널 공사가 한몫한다. 공사가 꽤 오랫동안 중단된 채로 그대로 방치가 이어졌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보상하고 주민들에게 양해를 구했는지 어느 날부터인가 공사가 재개하더니 완공이 다 되어 개통만 기다렸다. 가끔 아파트 베란다로 순환도로를 바라보면서 차로 저 황송터널을 지나치고 싶었다. 작은형이 집에 오면 부탁할까 벼르고 있다 가도 오랜만에 보는 반가움을 만끽하다 보면 잊어버리기가 십상이었다.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때마침 작은 형이 오랜만의 집에 왔다. 형은 인천에서 직장을 다니기 때문에 17평짜리 전세 아파트에서 자취한다. 가끔은 차를 몰고 집에 들르고 부모님만 뵙고 갔다. 그날은 예외인지 시간을 질질 끌었다. 하룻밤 묵고 갈 거야. 네 방에서 같이 자도 되지? 형은 내 방에 처음 들어온 손님처럼 여기저기 흩어진 책들을 훑어보기도 하고 새로 산 오디오의 작동 법을 묻기도 하였다. 너덜너덜한 책들이며 벗어진 옷가지. 재떨이의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 형 앞에 서 있는 내가 무척 부끄러웠다. 언제나 형 앞에서는 당당하고 멋있는 아우로 인정받고 싶었지만 그러지를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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