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첼로 -12

승동과 애틋한 사랑의 필연

by 이규만

우선은 보는 눈들이 많았고 승동이 키위를 깎고 있는 동안 일에 대한 지적사항이 상사로부터 튀어나왔다. 누구, 어느 상사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입바르게 떠들기 좋아하는 혜정이 내게 말해줘서 알았고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랬다니까. 승동이 아저씨가 왜 생크림 반에 와서 키위를 깎나. 그것도 왜 언니 앞에서. 하여튼 저년의 조동아리는 가만히 있는 때가 없어. 그만해라. 데커레이션 부서의 한 사람일 것이다. 아무리 점심시간이 쉬는 시간이지만 그 시간을 생크림 반에 가서 키위를 깎는다는 것이 도저히 용납이 안 되었나. 데커레이션 부서 일도 점심시간에 이어 놓아도 모자랄 판에 한가롭게 생크림 반에서 키위를 깎는 일이 말이 되냐. 여자가 해야 할 일을 남자가 그러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나. 뭐 꼭 일이란 것이 남자 일, 여자 일 구분해 놓자면 거기서 거기고 따지자고 들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누구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어가면서까지 승동이 키위를 깎을 리는 없었다. 전녹중 계장 입에서 나온 말은 아닌 것 같고. 누굴까? 이제윤 반장? 최정근 반장? 김창식 기사? 아마도 김관호 계장이 가장 유력하다. 그는 영은도 싫어하는 상사였다. 옆에서 말로만 들었다. 겪어보지는 않았다. 저렇다 이렇다 꼬집어서 말할 때가 많아 새로 들어온 여자 사원이 싫어해. 아니나 다를까. 그 방해꾼 중에 한 사람은 김관호 계장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불러다 놓고 진지하게 일을 구분해서 말한 것이 아니고 농을 늘어놓는 거처럼, 비웃으면서 스쳐 지나갔다. 김 계장은 버터케이크 위에 올릴 꽃을 짜느라 양과 반 냉장고와 데커레이션 부서로 자주 오가고는 했는데 슬쩍 내 곁으로 와서 한마디 하고 갈 때 그게 치명타였다.

“요즈음 승동이랑 키위 연애 잘 되어가?”

그게 입에서 입으로 해서 금방 우스갯소리로 퍼졌고 금방 승동의 귀에도 그 말이 그대로 전파됐을 것이다. 더 이상 그가 내게 다가오는 일은 없었다.

나는 그래도 누가 뭐라 하든 간에 승동이 곁에서 그렇게 있었던 시간이 잠시 행복했었다. 너무 짧은 시간이었지만 달콤하고 찌릿하고 또 안일하기 그지없고 그와 내가 단둘이 가깝게 곁에 있었던 특별한 시간이었다. 누구의 눈치 볼일도 없었고 내가 첫눈에 보고 좋아한 사람이 가깝게 숨 쉬고 느낄 수 있던 조금은 긴듯하고 너무도 짧았던 때가 왔으면 그랬다. 작업장 내에서 그와 이렇게 가까이 얼굴을 마주 보고 눈빛을 교환하며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다시 올 리 없었기에.

아무튼 그랬다. 키위 깎는 일은 그쯤에서 멈춰졌고 할 일이 없어진 나는 너무나 아쉬워서 주문장만 만지작거렸다. 이제 승동에게 접근할 여지가 없었다. 그가 다가온 것이지, 내가 그가 있는 곳으로 갔던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가 내게 다가와서 저녁때 술 한잔하자 했더라면 나는 얼마든지 응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없었고 얄궂게 그레이스 오븐 쪽에서 치즈케이크를 굽는 용준이 다가와 날 괴롭혔다. 애프터 신청 같은 거였다. 차 한잔 마시자. 계속 말을 걸어왔다. 나는 아무 대답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점심시간의 작업장에 올라가기 싫을 정도로 치근댔다. 승동을 보았다. 멀찍이 데커레이션 케이크 반 바인더 앞에 승동은 나의 이런 상황을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건지 의외로 조용했다. 그가 조용한 것이 답답해서 말해 주고 싶었다.

용준이 자꾸 나한테 밖에서 커피 한잔하자는데 뭐 하고 있어? 빨리 좀 와서 말려줘. 애숙이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말이야.



점심시간은 물 흐르듯 지나 그와는 가까이서 보낼 수 없었다. 그가 식사하고 커피를 한 잔은 꼭 마셨다. 커피자판기 앞으로 그에게 빠르게 다가서자 그가 얼른 커피, 프림만이 들어간 커피를 뽑아 주었다. 설탕은 빼고. 어느새 나의 취향까지 파악한 걸까. 아니다. 전에도 그 앞에서 내가 설탕 들어간 커피는 안 먹는다고 한 적이 있었었다. 그가 그걸 안 잊고 기억했다. 나는 그와 커피를 마시는 때가 좀 길게 갔으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네 앞에서 뚝딱 자판기 커피처럼 나오는 그런 여자였으면 좋겠어. 커피 한 스푼 프림 두 스푼의 여자. 그래. 나는 너의 커피야. 그가 말한 것같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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