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연애, 길량 언니와의 이별.
제품으로 포장해 출하되었더라면 굉장한 클레임 건이었을 거다. 한편으로 밤늦게까지 일하는 처지가 전에 없이 처량했어.
진숙이 해주는 얘기를 듣자니 일하는 과정에 재밌는 에피소드라기보다, -밤늦게까지 일하는 처지가 처량하다-는 말이 깊이 박혔다. 네 처지나 내 처지나 뭐가 다르겠니.
생크림 부서는 한 시간 먼저 일찍 끝나 기숙사에서 씻고 있을 무렵에 진숙이 그제야 왔었다. 수고했어, 너도 얼렁 씻어. 도넛 모양 같이 생긴 케이크인데 서울 서초구 반포점에서 특별주문이 백오십 개 넘게 들어와서 맨 나중에 하느라고 늦어졌어.
시기적으로 끝이 보이지 않던 일이었다. 너무도 벅차고 지쳤다. 작업장을 벗어나 쉬면서 동료와 담소를 나누고 싶었다. 생각은 굴뚝같았지만 그걸 직접적으로 떠들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 일을 빌미로 해서 내게 작업장에서 말을 걸어오고 동료들이랑 술이라도 한잔했으면 의도를 비친 거는 그즈음이었다. 점심 시각에 잠시 모였을 때 승동의 의도를 상준이 나서서 전달했다. 나와 진숙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좋았고 신났다. 진숙이가 양과 반에 와서 이야기하는 동안 그렇게 밝고 기쁨에 넘친 표정은 처음 보았다. 언니. 승동 아저씨랑 상준 씨가 같이 술 한잔을 하자는데 같이 갈 거지? 나는 대답할 것도 없이 외려 되물었다. 정말이야? 너무 근사해. 생각지도 못한 것을 획기적으로 말한 거처럼 들렸다. 그럼 가야지. 당연히 가고말고. 그것은 문학적 개념으로 들추자면 센세이션이었다.
사복을 갈아입고 저녁에 회사 주변에서 승동을 보았을 때 나는 그가 너무 좋아서 바로 옆에 바짝 따라붙었다. 사복을 입은 그를 만나는 것이 도대체 몇 개월 만일까. 헤아려 보지는 않아도 그와 다정히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이제 누구 눈치 볼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자, 모든 것이 들떠 있는 세상이었다. 퇴근 때라 길량 언니랑 다른 동료들이 보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누가 뭐라 하던 그와 나만 좋으면 그만이었다. 그의 곁에서 한동안 그렇게 걷고 싶었고 오래도록 누리고 싶었다. 나는 어깨라도 부딪치고 싶었다. 내가 잘하는 팔짱이라도 끼고 싶었다. 그런데 그는 어찌 된 영문인지 무척 화가 난 것 같았다.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부담돼서 저러나 싶었고 그만 어리둥절해서 뒤처졌다. 따라오던 진숙이가 언니가 그만둔다는 연유를 알려주었다. 그런 길량 언니한테 화가 나서 그녀에게 소리치던 중이었다. 그런 언니한테 화를 있던 차에 내가 그에게 다가서려 했다니. 나도 그만 좀 어이가 없었다. 하필 언니가 같이 그 옆에 있다니 좀 비극적이었다. 언닌 정말 끝까지 날 안 도와주었다. 남녀 네 명은 술자리를 빌미로 약속에 신나 있는 상황에 언니는 힘들어서 지친 상태였다. 무척 힘들어하던 모습에 그도 되레 위로되지 못한 채 화만 내었다. 길량 언니가 멀어지자 승동은 같이 퇴근한 다른 여러 명의 사내 직원들의 눈을 의식했다. 기숙사에 들렀다가 삼십 분 후에 육교 밑 버스정류장에서 보자. 그 말도 상준한테 전해 들었다. 나한테 직접 해주면 어때서. 뭐가 그렇게 옆의 사람 눈이 두려워서 그럴까. 승동한테 마음이 갔는데.
너무 아쉬웠다. 승동과 맞닥뜨려지는 순간순간이 아슬아슬하고 정도에서 벗어나 항상 잘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드물었다. 오랫동안 흐뭇하고 밝은 그의 모습을 곁에 두면서 그렇게 그런 기분으로 걷고 싶었던 내 되바라진 바람도 여자의 허영심이나 부질없는 욕심이라면 차라리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도 들뜬 감정의 사치에 불과할 일이다. 언니를 원망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처음 그를 만나게 유도하거나 이용한 것도 언니를 통해서였다. 그래봤자 그의 다른 모습을 보고 싶어 하고 더 알고 싶어 안달을 낸 내가 그와 나만이 가지는 비밀을 쭉 간직하려 하던 시도에 불과했으니까. 단지 그와 내가 서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진숙과 상준만이라도 알아주길 바랄 뿐이었다.
“언니. 승동 아저씨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에이 뭘 기다려. 뭐 하러 다시 기숙사에 들어가? 그냥 육교 밑에 가 있자. 애.”
“언니 안달 났구나?”
“내가 그래 보여?”
“응. 좀 그래 보여. 막 들떠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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