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크리스마스 -26

지금은 다 철거된 구시가지 종합시장

by 이규만

크리스마스는 아직 멀었다. 그날이 오려면 키위를 아마 몇십 만개를 넘게 깎아야 하고 깎은 것을 도마 위에서 얼마나 썰어내야 하고 몇천만 킬로 되는 생크림이 필요할지는 몇천 만개의 시트 조각이 필요할지는 주님만이 아실 것이다. 차라리 그 수를 헤아리는 동안 그를 모른 척하고 지나치거나 크리스마스 같은 것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큰 의미를 부과하지 않았으리라.

세월을 저울질할 때면 작업장 뒤로 큰 엘리베이터가 보이고 올라왔다 내려가는 것을 수없이 바라봤다. 원래는 화물 엘리베이터라 자재나 생산된 물건을 가지고 내리거나 올리지 않는 이상은 사람만이 탈 수 없었다. 그렇지만 가끔 점심을 먹으러 갈 때나 저녁을 먹으러 갈 때면 지하에 있는 식당으로 바로 연결되기 때문에 나도 혜정과 순임이랑 엘리베이터를 탔다. 벌써 새로 지은 건물에 새로 설치된 엘리베이터는 여기저기 낙서들로 가득하고 동료들의 이름들과 상사들의 이름들이 무수하게 펼쳐졌다. 크리스마스를 대비해서 아르바이트생들이 대거 모집되었고 난리 북새통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동안 여러 명이 거기다 낙서를 한 듯싶었다. 거기에는 제임스 사버의 명언도 보였다.

-어떤 일이건 60분을 계속 생각하면 결국 도달하는 것은 혼란과 불행이다.

누가 저 말을 썼을까. 유성 매직으로 써서 잘 지워지지도 않고 또렷하게 날림치로 휙 날아다니는 문장이었다. 행복과 불행을 묘하게 흘러가는 시간과 매치시킨 말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덜컹 멈추거나 한다면 우리는 한동안 갇혀서 무엇을 생각하게 될는지는 예상한 바가 없었다. 어서 나가기만을 바라거나 구해달라 소리칠 뿐.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몇 번은 자재과에서 생크림을 져 날랐다. 계속 지나간 일에 미련을 두고 얽매이면 힘들어지니 그 선에서 생각은 멈추라. 자재과에서 짐을 올리다 몇 번 남자들이 갇힌 이야기를 들었다. 유압식이라 위에서 떨어지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야. 말은 그렇게 했어도 답답해 써놓은 낙서 같았다. 갇힌 생각하지 마. 사버의 말이 더 나를 괴롭혔다. 시간과 엘리베이터. 그리고 승동. 계속 생각났다. 그래. 나는 지금 불행해.

가끔은 밥 먹으러 갈 때 이용하면 전녹중 계장한테 걸려서 혼이 났다. 그는 그럴 때마다 엄포를 놓고는 했다. 한 번만 더 여자들이 짐도 없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 시말서를 받아 낼 거라고. 엘리베이터가 자주 고장 나서 갇힐 수도 있단 말이야. 안전교육을 해야겠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으면 일하는 것 이외에 갖가지 이야기들이 넘쳐났다. 잠깐 스쳐 가는 이야기들로 아르바이트생 누구누구의 사사로운 성격 하나부터 해서 집 사정 이야기까지. 그래도 가장 중심적이고 가장 가까운 화젯거리는 누가 누구를 좋아하니 만나고 어울린다는 내용이었다. 입바른 혜정이 그걸 엘리베이터 안에서 폭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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