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메피스토 -4

계장급에서 이사급으로 바뀐 전녹중. -세월의 진작.

by 이규만

승동이 처음에는 미덥지 않아 하는 눈치였다. 좀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통화하고 목소리까지 확인하고서야 ‘아, 애숙이구나.’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의 목소리는 들뜬 것 같았다.

그와 통화를 한 이후에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다. 그와 결혼한 여자는 누구이며 무엇해서 먹고사는지. 그도 나와 연락이 닿고 나서 궁금한 것은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남편이 누구이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를 궁금해할 것이다.

내가 P 크루아상을 그만두고 집에 돌아왔을 당시만 해도 대체로 모든 것이 지쳐 있는 상태였다. 내 월급통장에는 삼천만 원이 약간 넘는 돈이 있었고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언니한테 치료비로 쓰일 수 있다면 얼마든지 내놓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언니의 돈을 갚으려고 했었다. -공장에 있을 적 생각했었던 그 부가가치의 준한 액수라며. 또한 생각처럼 언니가 애리한테나 주라고 한다면 요긴하게 쓰일 돈이었다. 안 그래도 애리가 대학합격을 해놓고서 시무룩하게 보내고 있을 때였는데 등록금으로 쓰일 수 있다면 보태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둘 다 아니랬다. 언니는 내게 부정적 의사를 밝혔다.

-부질없어.

애리도 말했다.

-장학생으로 갈 방법을 찾고 있으니 신경 쓸 필요 없어.

물론 불임 치료할 돈이 없어 언니가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닐 테고. 만약 내가 그 치료비라는 명목하에 떠들었다면 버럭 화를 냈을 것 같았다.

-병원에? 글쎄 거길 내가 왜 가야 하는 거니? 아무렇지도 않은데 검사를 왜 해? 그리고 몸 검사하는 데 돈이 왜 그렇게 많이 필요한 건데? 너도 참.

-나는 둘째 언니처럼 되기 싫었거든. 무작정 학교 시험만 보면 뭐 해. 대책이 있어야지. 집에서 뻔히 못 보내줄 것 알고 있었다고. 그래서 장학생 뽑는 대학으로 지원한 거야. 그 부대비용도 만만치 않아. 기숙사에 들어갈까 고민 중이었는데. 설령 언니가 그 돈을 보태준다고 해도 싫어. 나중에 갚아야 하니 싫다고.

그랬다. 내가 우쭐대면서 그간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이라는 것을 가족들에게 자랑삼아 떠든 것뿐이 안 되었다. 그러고 보니 언니나 형부를 위시한 시부모님들의 강요 따위가 괴롭혀 온 일들과 겹치고 나름대로 생각 같은 것이 있었을 텐데. 내가 그것을 완전히 무시한 처사였다.

그 당시 장학생선발이라는 것을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런 것이 있는 것조차 몰랐다. 그때 같이 합격한 경애는 왜 그런 것은 한 번도 일러주지 않았을까. 자기밖에 몰라. 어쨌든 세상은 뭐든 자신 위주였다. 나도 내 생각만 하다가 언니나 애리에게 부담감을 위시한 괴롭힌 것은 아닐까.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나로서는 허망함이 온 두루 마음을 그득 메웠다. 그냥 거길 계속 있을 걸 그랬나. 빵순이로 문드러지도록 일만 하다 지낼 걸 그랬나. 이럴 땐 키위를 썰어낼 때가 최고인데.


승동이 그 이후에 어떻게 지내는지는 일하는 동안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의 집도 그의 연락처도. 그가 나간 뒤 거의 일여 연 만에 나도 그만뒀다.

곧바로 집으로 왔을 때는 갈팡질팡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을 적이었다. 엄마는 이끌었다. 성당에 같이 가자. 뚱딴지같았다. 건성건성 왔다 갔다 하는 나를 갑자기 엄마는 성당에 데려가려 하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엄마가 말해주어 알았다. 눈빛이 전과 달랐어. 남자한테 실연당한 것 같았지. 하루라도 빨리 시집보내야 마음이 놓이지. 그럴까. 시집이나 갈까. 그게 나을지도 몰라. 엄마는 나를 교우들 앞에 의도적으로 이끌었다. 종교는 외적이지만 여자는 드러난 모습들이 가냘프고 어렸다. 마치 숨겨두었던 과일 하나를 싹싹 닦아서 손님들에게 내놓은 심정과도 같이 엄마의 표정은 바짝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어렸을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엄마는 어렸을 적부터 나를 우리 집은 천주교 집안이라 강조한다거나 해서 모태신앙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어쩌다 생각이 나면 가끔 미사 보는 것조차도 본인들의 의사에 의해 성당에 같이 가게 되면 가는 것이고 아니면 그만이었다.

성당에 가면 신부가 있고 신부 앞에서 비공개로 고백성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참 동안을 망설였다. 거기서 승동의 이야기를 할까 말까를 고심했다. 한 남자를 알았고 한 남자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남자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바로 그때 신부님의 강론이 시작되었고 거의 미사가 끝났을 무렵에 미사포를 벗어 내렸더니 나와 엄마 앞에 곧 그이가 서서 날 바라봤다.



“여기 전녹중 계장님이…….”

“아. 전 이사님이요. 원래는 일반 방문객은 공장 견학이 안 되는 것 아시죠? 특별히 이사님이 맞이하는 손님이라서 허락하는 겁니다. 여기 방문출입증 패용하시고요.”

탈의실에서 전용 가운과 마스크, 위생모, 덧신 등으로 갈아입은 후에야 생산 공장 출입구 앞에 설 수 있었다. 이사구나. 전 이사. 얼추 예상해도 그 정도 직급까지는 오를 줄은 몰랐다. 전혀 예상 밖에 일이었다. 생산직 현장에서만 일했던 그가 임원직까지 오른 것을 보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고 인정받기까지 그 열정을 쏟아부었을지 가늠해 보았다. 일반 대기업의 회사치고 현장직에서 일한 사람을 이사로 발령 내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통상적으로 일반 기류에 속한 회사라면 흔치 않은 일이었다. 가능한가? 나한테 뻥 치는 거 아냐? 전 이사님이라니. 옆에 사람들한테 돈 주고 매수한 거 아냐? 내가 예전 같이 일했던 친구인데 오랜만에 찾아왔는데 쪽팔리잖아. 돈 줄 테니까 연극 좀 해줘. 이사면 아랫사람을 위해 물러나야지. 그동안 그렇게 많이 아랫사람 괴롭히고 회사 속여왔으면.

공장 안 휴게실에서 흰색의 말쑥한 정장 차림에다 빗살무늬 흰색 넥타이를 찬 그가 나타났을 때는 나도 모르게 탄성 질렀다. 아…, 어쩌면 그렇게 예전 그대로이세요. 십 년이 흘렀건만 전과 다름없이 하나도 변치 않은 그의 모습이었다. 내가 일하러 면접을 보러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래도 오십 줄은 훨씬 넘었을 텐데.

“그래 이제 왔구나. 제법 이제 아줌마티가 난다.”

애가 둘이나 있으면서도 전 계장한테서 아줌마 소릴 들으니 기분이 상했다. 전 계장이 오랜만에 보자마자 나를 놀리려고 핸디캡으로 일부러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래도 그렇지. 아줌마가 뭐람. 아줌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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