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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만 Sep 12. 2023

어머니가 죽었다.

작은형의 파우스트 중에서. 

어머니가 죽었다.                              

 어머니가 죽었다. ‘이방인’의 첫 문장이다. 이방인의 첫 문장이지만 그 문장대로 내가 가족들과 함께 장례를 치렀다. 바로 어제까지 어머니 유해를 화장하고 용인 납골당에 안치했다. 

 삼우제를 지내고 나온지라 온몸이 부서질 정도로 피곤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씻고 나니 잠이 쏟아졌다. 

 잠을 자고 일어나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니 정오가 약간 넘은 시각이었다. 아버지가 먼저 일어나 거실에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상태였다. 거실에 나가 나도 아버지 옆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다가 어머니가 입었던 옷을 보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그렇게 많이 울었는데 눈물샘이 마르지 않았다. 나는 남자라 눈물이 적은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머니의 빈자리가 너무 허전했다. 집의 어느 한 곳 어머니 체취가 고스란히 느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전에 어머니에게 내가 했던 독한 말들을 기억하면서 힘들었다. 나는 어머니처럼 안 살 거야. 뭘 하나라도 아끼려는 습관이 너무 애처로웠다. 어머니. 제발. 그만 좀 해. 이 옷으로 좀 갈아입어. 이렇게 멀쩡한 옷 놔두고 다 터진 옷을 입어. 어머니는 하나라도 아끼려는 습관이 처량하고 궁상맞아 보여서 던진 말이었다. 네가 뭔 상관이야. 내가 이 옷을 입든 말든. 그런데 그 습관이 집안의 온 두루 어머니의 흔적으로 남아 그게 느껴지니까 너무 괴로웠다. 이 옷은 어머니가 입던 옷이었는데. 이 콜드크림은 어머니가 쓰던 유일한 화장품이었는데. 어머니가 보던 텔레비전. 어머니가 앉았던 의자. 어머니가 끓여준 커피. 모든 것이 되살아나서 나를 괴롭혔다. 어머니가 항상 앉아 있던 거실이 황량하게 쓸쓸해 보였다. 그냥 어머니는 잠시 출타 중이고 곧 돌아와 다시 제자리로 앉아 있을 것만 같았다. 자꾸 눈물이 흘러내린다.      

 어머니의 병명은 ‘위암’이었다. 평소에도 위가 안 좋아서 위장약을 음료수처럼 음용했었다. 병원에서 위암 말기라는 선고를 받았을 때는 벌써 한참이나 때가 늦어있는 상태였다. 암이라는 놈은 온몸 깊숙이 퍼져 콩팥에 전이가 되어 있다. 의사의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돌이켜 보면 어머니가 병원에 있는 이 주 동안이 의구심투성이었다. 5월 6일 병원에 처음 입원해서 검사하고 5월 19 오후 세 시 중환자실에서 숨을 거두기까지가 너무 이상했다. 암 환자진단을 해놓고 병원에서 그대로 안일하게 방치했다.

 돌이켜보면 어머니가 이제 거동을 하실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나빠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병원에 보낼 수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아버지나 나나 어머니의 상태를 정확하게 잘 몰랐었고 치매 현상을 무시할 수 없는 상태였다.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는 기분이 들었었다. 그래서 따로 살림을 나가서 사는 큰형이 평소 내 말이나 아버지 말을 종합해서 어머니를 차에 태우고 입원시킨 병원이 ‘보바스 기념’ 병원이었다. 서울대 분당병원의 분점이었다. 큰형도 병원이니 노인들만을 전문으로 치료한다고 해도 응급환자는 제대로 다룰 줄 알았다. 거기는 다시 말하면 요양병원이었고 수술할 수 있는 도구나 검사시설이 없는 병원이었다. 지하에 ct나 nri 촬영을 할 수 있는 시설이 있다. 엘리베이터에 분명히 명기되어 있기는 한데 눈으로 확인해 보질 않았으니 그 기기들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또한 있다고 한들, 가동이나 될까. 재활치료를 하는 병원이었다. 헬스장처럼 운동기구들이 잔뜩 눈에 들어왔고 수시로 휠체어를 탄 환자들이 들락거렸다. 


 어머니가 소파 아래서 앉아만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할 때부터가 벌써 늦었던 상태이다. 어머니는 아픈 것을 간간이 참고만 있었던 거였다. 텔레비전에서 맛있는 음식을 소개하는 장면이 나오면 ‘아 저것 먹고 싶다.’ 몇 번씩 말할 때도 나는 모른 척하였다. 내가 라면을 한 젓가락 먹을 때 옆에서 달라고 할 때 모른 척하였다. 또 먹다가 뱉으려고. 

 아버지는 어머니가 구미가 당기게 닭튀김에다 초밥에다 각종 튀김까지 사 와 밥상을 내밀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보기만 하고 아무 말이 없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갖가지 음식을 사 와 먹이려고 노력을 많이 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말도 못 하고 아버지만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는 모습에 내 억장이 무너졌다. 눈물이 나왔다. 

 그게 불과 한 달도 안 된 일이었다. 어머니는 그 이후로 아예 앉아 있지도 못한 상태가 되었다. 그래도 어머니가 이제는 오줌도 똥도 못 가린 정도는 아니라고 봤다. 정신을 놓은 상태가 정말 아니었다. 몸을 가눌 수가 없어 화장실을 갈 때마다 아버지를 찾았다. 누워있는 거실에서 화장실까지 불과 삼 미터도 안 되는 거리였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데리고 화장실까지 갈 때 나도 합세해서 도왔다. 그런데 이미 화장실에 도착하기까지 내 옷가지는 어머니 오줌으로 젖어버렸다. 어머니는 음식을 못 먹은 상태가 너무 오래되었고 물만으로 연명하는 때라고 봐도 무관할 만큼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그래도 어머니는 내 앞에서 그렇게 싼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렇게 어머니는 정신이 있는 상태였다. 나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큰형한테 전화했다. 부담 안 주려고 아버지나 나나 연락을 취하지 않았었다. 구급차를 불러 입원시켰더라면 몸이 이런 상태까지 왔는데. 약국이나 의료상담자한테 물어보지도 않았다. 정말 이대로는 말 그대로 방치밖에 되지 않았다. ‘가족이 옆에 있는데 병원에 한 번도 데려가지 않았다’는 말을 다른 삼자한테 듣기 싫었다. 그런데 나 자신의 방관이 더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아버지가 알아서 하시겠지. 이마트에서 일하는 데 어머니 생각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흐트러지고 어지러웠다. 나는 일하러 나왔고 아버지와 큰형이 어머니를 차에 겨우 태운 거였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어머니에게 의사들은 피만 계속해서 뽑아대고 주삿바늘만 꽂고 아무런 조처를 하지 못했다. 인턴들만 계속 왔다가는 곳이었다. 어머니는 인턴들의 실험 대상물이었다. 오줌도 받아서 검사해야 하는데 그렇게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환자가 기다렸다가 억지로 오줌을 내보낼 수 있을지 만무하다. 내가 몇 년 전에 병원에 갔었을 때 기억하기로는 환자의 오줌을 받아내는 기기가 따로 있는데 그것조차 그 병원에는 없던 거였다. 

 검사 결과는 나오지 않았고 그대로 다시 집에 돌아왔다. 어머니 상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아버지가 어머니가 싼 오줌을 받아 병원에 갖다주었다. 검사 결과는 그래도 나오지 않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명만 병원에서는 둘러댔다. 큰형은 큰형대로 신경질만 부렸다. 뭐 하러요? 그 오줌을 받아서 병원을 가져다주세요? 고생스럽게. 의사가 모른다고 하잖아요. 전화기에서 신경질만 부리는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옆에서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어머니에게 음식을 먹이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기울였지만, 어머니는 계속 가래를 뱉어내는 끌끌 소리를 크게 내고 휴지 두루마리에 침만 뱉어냈다. 어머니는 누워서 콧노래를 불렀다. 병을 이기기 위해 고통을 이기기 위해 노력 중이란 걸 나는 그때까지도 몰랐다. 너무 바보같이. 그 콧노래가 너무 귀에 거슬려서 힘들었다. 어떤 때는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수없이 오토리버스가 되었고 텔레비전에서 콘서트 7080에서 나오는 노래가 흘러나오면 그대로 그 곡도 반복이 되었다. 밤새도록 콧노래는 흘러나왔다. 돌이켜보니 어머니는 고통이 더 증가하였는데도 힘들다는 말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 

 중간에 보바스병원에서 소개해준 간호조무사 한 분이 찾아왔다. 신속하게 그분은 어머니의 혈맥을 찾아 링거를 꽂았다. 상태가 정말 심각하네요. 왜 병원을 가지 않았죠? 갔다 왔는데 원인을 모른대요. 아버지는 힘든 표정을 지었다. 

 링거 두 개를 다 맞고 나자 어머니는 몇 달 동안 한 번도 싸지 못한 똥을 쌌다. 먹은 것이 있어야 똥을 싸지. 아버지는 어머니의 엉덩이를 닦아냈다. 어머니의 똥은 별로 구리지도 않았다. 나는 신속히 어머니가 치댄 이불을 욕탕에 담그고 빨았다. 아버지가 옆에서 한숨만 푹푹 쉬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아버지는 보바스병원에 어머니를 잠깐 봐준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시 검사해 주세요. 입원해야겠어요. 구급차를 부르죠. 

 원치 않았지만, 의사들은 다시 어머니 혈맥을 찾아 피를 뽑았다. 그리고 링거를 꽂았다. 아버지나 나나 검사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렸지만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입원한 병동에 같이 밤을 새우고 싶어 했지만, 간호조무사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병원 규정이라 안 돼요. 돈을 더 내라는 말이었다. 하루에 일백만 원을 호가하는 병동에 입원하면 그럴 수 있다는 거였다. 어머니가 입원한 병동은 6인 병동이었고 중국 사람들이 왔다 갔다 했다. 국적은 중국이었지만 연변족이다. 말투가 어눌하고 거셌다. 어머니가 아버지가 없는 상태에서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나는 오후 조라 거의 매일 오전 중에 어머니 얼굴을 보러 병원에 갔다. 

 어머니는 자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걱정됐는지 수심이 가득 차 보였다. 이제 막 잠들었는데. 깨우지 마라. 그래도 나는 어머니가 나를 알아보게 손을 잡았다.

 “어머니 나야. 나 알아보겠어? 어머니 막내아들.”

어머니는 눈을 뜨고 나를 멀뚱멀뚱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너무 불쌍해서 눈물이 났다. 그때까지도 병원에서는 검사만 해댔다. 치료는 뒷전이었다. 그리고 검사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일주일도 훨씬 넘었는데.

 아버지는 아침 일찍 병원에 갔는지 아침에 일어나 보면 방안이 이부자리만 정리된 채 휑했다. 병원에서는 링거만 꽂은 채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때로 어머니가 링거를 뺀다고 연변 간호조무사가 어머니 팔을 묶으려 들었다. 아버지가 진노했다. 나는 그 말을 밤에 일을 마치고서야 아버지한테서 들었다. 

 “세상에 이런 병원이 어디 있습니까? 내 마누라가 실험물입니까? 검사한다면서 대체 검사 결과는 언제 나오는 겁니까? 맨 인턴들이 와서 주사만 꽂아대고, 혈맥도 제대로 찾지 못하는 의사가 의사예요?”

 입원한 지 일주일이 넘도록 검사 결과조차 알려주지 않으니 아버지가 너무 힘들어서 소리를 질렀다. 환자접수대에 앉아 컴퓨터만 종일 쳐다보는 간호사들이 당황하고 여기저기 호출을 했다.      

 아버지는 검사 결과를 주치의한테 전화 통화로 통보받았다. 아버지가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는 것을 내가 옆방에서 들었다. 아버지는 묵묵히 듣고만 있는 상태였다. 그러다가 통화가 끝났는지 나를 불렀다. 

 “위암이래. 말기. 그리고 전이가 돼서 콩팥하고 간도 엉망이래. 아래 창자 쪽으로 다 번졌다는 거야.”

그들은 의사가 아니었다. 일주일 동안 삐쩍 마른 어머니를 두고 마루타처럼 다루었다. 암 환자를 거기서 그대로 방치한 셈이었다. 내시경검사를 하고 나서야 몸이 어떤 상태인지를 알아내는 곳이 병원이라니.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어머니는 위급을 다투는 환자였다. 그런데 보통 병실에서 계속 그런 상태로 있었다. 그렇게 말하면 아버지와 나도 이 상태가 될 때까지 아무런 조치도 안 한 것이 더 잘못이었다. 어머니가 걷지도 못하고 음식을 못 먹을 정도면 바로 응급환자로 병원으로 입원시켜야 했는데 너무나 안이하게 바라만 보았다. 다른 병원으로 옮기고 싶다. 아버지는 수없이도 병원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아버지는 의사한테 수술까지 물었지만,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절개하면 복개조차 어렵다는 거였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야. 저렇게 죽을 때까지 기다리란 거요? 아버지는 목이 쉬도록 소리쳤다. 일주일 동안 환자 몸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는 병원에 사람을 맡길 수 없다.

 그동안 작은형과 큰형이 계속 병원에 다녀갔다. 작은형은 덤덤해 보였고, 큰형은 큰형수랑 같이 와서 우는 모습을 보았다. 

 “아니 그래도 내가 병원에 데려왔을 때는 이러지는 않았는데. 어떻게 된 거야. 이젠 나도 못 알아보고. 그런데 왜 물은 못 먹게 하는 거야. 이런 세상에.”

큰형의 안경에 눈물이 고였다. 어머니는 계속 인사불성 상태였다. 나는 두 분을 대할 면목이 없었다. 마치 내가 죄인 같았다. 어머니는 계속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새벽에 아버지 휴대전화로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형들한테 연락해. 때가 온 것 같아. 어머니 중환자실로 옮겼대. 빨리 얼른 차려입어.”

 중환자실로 옮긴 어머니 모습이 더 안타까웠다. 링거도 꽂았지만 이마 쪽에 무슨 기기를 더 갖다 댄 상태였다. 그 기기의 숫자판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어머니가 저렇게 힘들게 숨을 몰아쉬는데 산소마스크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 병동은 사람들이 더 많은 곳이고 커튼만 개별로 칠 수 있는 곳이었다. 암 환자를 그렇게 손쉽게 다루는 곳이라니. 면회객들이 수시로 왔다 갔다 해도 아무런 제지도 없었고 간호사들도 마스크만 했고 위생모를 쓰던가 신발조차 신지 않았다. 그런 곳이 암 환자를 다루는 병동인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어머니가 너무 걱정돼서 힘들었다. 아버지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그런 모습을 쭉 보다가 너무 답답해서 병원을 나왔다. 마트에 가서 일했지만 일이 손에 잡힐 리 없었다. 

 오후 세 시쯤이었다. 큰형한테 휴대전화로 연락이 왔다. 

 “어머니 돌아가셨다.”

 병원으로 가기 위해 차를 탔지만, 시야에 눈물 멍울이 자꾸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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