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데이
여동생이 태어났을 때 우리는 울산에서 살았다
한국 경제가 연 평균 10% 이상으로 급속 성장하던
대 성장기에 울산은 제조업, 국가 기반 산업의 현장이었다
고액 연봉을 주는 탄탄한 직장들이 많았고
현장 근무에 따른 추가 수당도 주어졌으리라
우리는 3~4년을 울산에 살았다
당시에 회사 사택도 주어졌다고 한다
사택에 살때 엄마는 너무 좋았다고 한다
주거비가 절약되는데다가
서울보다는 물가도 훨씬 낮아기 때문이었으리라
역시 삶의 질의 기본은 '의식주' 가 맞나보다
나는 아빠 회사 유치원을 다녔다
모든 삶이 회사에서 제공되는 안락함에 의지할 수 있었던 시기었던 거 같다
아침에 남편들이 출근할때가 되면
사택에 사는 아내들이 모두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손을 흔들어주었다고 한다
괜찮은 직장에 다니는 균질한 가정이라는
커뮤니티에 속하고
사택 사는 엄마들간의 교류도 생기게 되며
엄마는 그 삶을 참 좋아하셨던 거 같다
여동생을 낳을때의 에피소드 역시
아빠가 단골처럼 들먹이는 것 중 하나이다
경산모는 출산 진행 속도가 상당히 빠른 편이다
아마 엄마아빠는 첫 출산의 경험에 비추어
느지막히 병원에 갔으리라
보통 출산할때 3종 굴욕 세트- 제모, 관장, 내진- 를 경험하는데 이 중 가장 먼저 하는 것이 '관장'이다
그런데 간호사가 정신이 없었던 것인지
진행이 너무 빨랐는지
미처 관장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안타까운 실수로 인해...
내 동생은 변과 함께 나왔다
어릴때는 이 얘기가 마냥 웃겨
동생을 죽어라 웃고 놀렸는데
지금 생각하니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한 그 간호사한테 가서 한바탕 따지고 싶다
회사 유치원은 참 좋았다
기억이 거의 남아있진 않지만
같은 회사를 다니는 부모들의 아이들이었으니
비슷한 소득 수준과 생활 환경을 가지고 있었고
선생님들도 검증된 분들이었다
거기서 내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어렴풋한 기억 속 친구들과 선생님은 따뜻했다
3~4년을 울산에 살다가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을 때
선생님은 A4 크기의 철제 상자 안에
친구들의 편지와 과자, 장난감 등을 가득 담아주셨다
짙은 핑크 빛이 도는 상자였던 거 같다
빨간 종이 상자였던가?
이상하게도 그 기억만큼은 오래 남아있다
아마 첫 사회생활의 첫 이별이었으니
그랬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또 하나 가지고 있는 기억은
내 스스로가 꽤 멋있던 기억이다
나는 꽤 활달한 아이었던 거 같다
유치원 시절 대표로 뽑혀
무대에 나가 독무를 하기도 하고
웅변 학원을 다니며
이 연사 외칩니다!! 를 부르짖기도 했다
반에 나보다 한살 어린 6살 남자 아이가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디나 약체를 알아보는
비열한 무리가 있는 법이지
유하고 보드러운 그 아이를 친구들은 수시로 괴롭혔다
나는 그 여리디 여린 아이 앞에 우뚝 서서 소리를 쳤다
"괴롭히지 마!"
아이들은 흠칫 놀라 쭈삣대다가 흩어졌다
이상하게 그 순간의 기억도 오래 남아있다
너는 내가 지켜준다- 는 마음이 들었던
첫번째 남자였다
혹 니가 내 첫사랑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약한 생물체에 대한 보호 본능이었을까?
아직도 알 수 없다
근데 그 이후에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남자는 없는 거 같긴 하다
지켜주고 싶은 남자는 지금도 내 스타일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지킴을 받고 싶은 쪽(?)이지
지켜주고 싶은 쪽은 아닌거 같다
이 터프한 세상에 누가 누굴 지키겠는가
자기 스스로를 지키는 것도
쉽지 않은 세상인걸
하지만 누군가를 지키려 노력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나를 대견하게 한 기억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