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3. 1988년~1991년 (7~10세)

by 나를찾는나

초등 입학을 앞두고

우리 가족은 서울로 돌아왔다

나의 교육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아빠의 직장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추측컨데 후자가 아니었을까?

삶의 만족도가 높았던 울산에서

굳이 나의 초등 입학을 위해 팍팍한 서울로 이사왔을리는 없었으리라


아무튼 우리는 서울로 이사를 했다

이사한 곳은 서울에서도 선호도가 낮은 지역이었다

물론 인 서울이지만 울산에서 사모님들과 같은 커뮤니티에 속하던 엄마에게는

삶의 질이 낮아지는 경험이었겠지


하지만 가난한 시골의 장녀로 태어나

이미 한차례 궁핍한 신혼 생활을 겪은 엄마에게는

또 해볼만한 삶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그때 엄마의 나이가 32살이었으니 아직 젊은 나이였고

살면서 내가 엿본 엄마의 긍정성과 회복탄력성을 감안하면

아마도 엄마는 밀려오는 우울감을 자아 긍정으로 씩씩하게 감추고

힘찬 서울살이를 시작 했을 꺼다






나는 총 3곳의 초등학교를 다녔다

2년에 한번 꼴로 전학을 했으니

초등학교 친구가 없는 게 이상하지 않으리라


그래도 부모님의 치열한 노력 덕분에

서울로 돌아온 우리는 인접한 상급지로 조금씩 발을 들이밀었다


물이 종이에 점점 스며들어 번지는 것처럼

우리도 아주 천천히 하지만 계속 나아갔다


비록 내 소유의집은 아니었다해도

근면성실한 여느 가정과 마찬가지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을 향해 계속 나아갔다

아마 내 부모님이 더 높은 목표를 바라보며 살았기에 가능했으리라





전학을 하도 많이 해서 그런지

사실 초등학교 시절, 특히 저학년 때의 기억은 많지 않다


나는 머리를 아주 길게 길렀다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는 나의 자랑이었다

무릇 여자아이들은 긴 머리를 자랑으로 여기지 않는가?


다만 엄마의 컨디션이 안좋았던 날에는

머리를 만져주던 엄마에게 머리를 호되게 맞거나

분풀이를 들었던거 같기도 하다

아마 나의 자랑이 현실의 엄마에게는 노동이었겠지


나는 피아노와 미술, 서예를 배웠다

미술과 피아노는 특히나 오래 배웠다

딱히 재능이 있지는 않았지만 나는 꽤나 성실한 아이였기에

초등시절 내내 재능 없는 예체능 학원을 다녔다


성실했기에 오래 다닌건지

오래 다니면서 성실이 몸에 밴건지 문득.. 궁금해지기도 하네


회사 선배에게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한 필수 과목으로

아빠가 미술을 듣고 와서 미술을 시작으로

피아노를 쳤던 과거 엄마의 꿈까지 투영되며

피아노로 과목이 확장되었지 싶다


예체능을 오래 한 덕분에

성인이 된 지금도 나는 음악을 좋아하고

미적 감각도 중간 이상은 간다고 생각한다

이런 문화적 유산은 성인이 되어 가지긴 힘들다는 걸 안

지금에서야 부모님께 감사하다 여긴다





학교에서는 깍쟁이 소리를 들었다

얼굴이 파리하게 하얗다보니 백혈병 소리도 들었던거 같다

도도하고 콧대높은 어린 아가씨로 어린 날을 보냈다


한번은 교과서인지 준비물인지를 못챙겼는데

당시 수업 준비를 안해온 친구들은

앞에 나와서 엎드려뻗치기를 하거나 손을 들고 있게 했다

어린 아이들을 수업 시간 내내 체벌을 서게 했으니

옛날 교육 방식은 지금생각해도 참 터프했다


도도한 깍쟁이로서는 너무나 자존심이 상했는데

얼굴이 허옇게 몰랑몰랑 모찌처럼 생긴 짝꿍이 자기 책을 쓱 밀어주고

스르륵 일어나더니 대신 체벌을 서주었다


그때는 그런 생각을 못했지만

아마도 나를 좋아했던 친구였겠지


고마운 마음에

하교 후에 우리집에서 만화영화 DVD를 보자고 했다


하교길에 보는 눈을 피해 멀직이 떨어져 걷다가

모찌군은 개구장이들에게 붙들려 사라졌다


생각해보면 아직 머리에 피도 안마른 것들이

뭘 내외한답시고 멀직이 떨어져 걸었을까?

내가 조숙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때의 사회상이 그랬던 것인지 잘 모르겠다






3학년 때이던가

한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외모가 화려하고 여왕벌 같은 아이였다


똑똑함이 지나쳐 넘쳤던 그 아이는

아주 영리하게 집단 따돌림을 주도했는데

하루는 A를 무리지어 괴롭히다가 또 다음 날은 같은 무리의 B를 괴롭혔는데

그렇게 특정한 가해자도 없고 피해자도 없는

어제의 피해자가 오늘의 가해자가 되고

오늘의 가해자가 내일의 피해자가 되는 방식이었다


아마 나도 피해자이자 가해자였으리라

치마를 들추게 하거나 발을 걸게 하거나

연필로 콕콕 찌르게 하거나

뒤통수를 때리고 오라고 시켰는데

정작 본인은 괴롭힘의 행위에 가담하지 않았다


한 학기를 고스란히 고통속에 다니며

나는 벌벌 떨었다

학교가 너무 무서웠다


그걸 6개월이 지나자 엄마가 눈치를 채셨다

아마 내 입으로 먼저 고발하지는 못했을 꺼다


엄마는 누가 괴롭혔냐고 물었는데

나는 주동자의 이름이 아니라

나와 같은 처지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친구들의 이름을 댔다

발고의 기회가 주어진 그 순간 마저도 나는 너무 무서웠던거 같다


엄마는 그 아이들을 불러 주의를 주었고

다행스럽게 그 아이들이 주동자 친구에게

더 이상 나를 괴롭히라는 지시를 따를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괴롭힘은 끝이 났다


그리고 여름 방학 기간 여왕벌이 전학을 가면서

짧지만 너무 길었던 6개월 간의 따돌림은 막을 내렸다


도도하고 자신감 넘치던 내 성격이

위축되고 소심해졌던 게 아마 그 무렵부터인거 같다

사회의 쓰디 쓴맛을 경험한 나는 세상이, 사람이 무서워졌다


그때 내 세상은 컴컴한 암흑이었고 공포였다

그 경험은 내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린 내 아이들이 혹여나

비슷한 경험을 겪을까 싶어

늘 말해주곤 한다


그런 일이 있으면 반드시 엄마에게 이야기해달라고.

엄마나 선생님, 어른들이 해결해 주겠다고

엄마도 그런 경험이 있는데 정말 많이 무서웠다고.

그때의 엄마는 나를 지옥에서 구해준 영웅과도 같은 존재였다


나도 언제든 아이들의 영웅이 되어야한다







무슨 일이든 수 년을 주의하고 조심하더라도

사고는 늘 한순간에 일어나는 법이다


정확히 내가 10대로 넘어가던 그 시점에

엄마 아빠는 사고를 쳤다


어느날부터인가 엄마의 배가 자꾸 커졌다

아기를 가진거냐고 물어도 엄마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했다


너무 순진했던 나는 엄마의 배가 자꾸 불러오는 데도

엄마가 아니라고 하니 정말 아닌가보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집에서 엄마 아빠가 사라졌다

그때 우리는 연립주택에 살았는데

지하에 사시던 할머니가 올라와 엄마가 동생을 낳으러 갔다고 했다


그러곤 오후 무렵 엄마가 핏댕이 아기를 안고 돌아왔다

그렇게 내겐 또 다른 동생이 생겼다


엄마에게 그때 왜 그랬냐고 물었보니

하나만 낳아 잘 키우자의 시대에

아이를 셋이나 낳은 것이 부끄러워 말하지 못했다고 한다


시대 정신은 정답이 아니고

그 무엇도 개인의 가치에 우월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지금에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만큼 오랜 기간

우리 사회는 소수의 정답지만을 집단적으로 추구해왔기에

일견 이해가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혹시라도 남아선호 때문인지도 물었었는데

그저 찢어진 콘돔이 가져온 사태라고 해명하셨다

그 답변은 그나마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아들을 낳기 위해서라는 답이 나왔다면

K장녀로서 상당히 서글펐을꺼 같단 말이지..

그리고 콘돔은 피임에서 만능이 절대 될 수 없다는 소중한 교훈도 얻었다







남동생이 태어나고 나서

우리는 연립주택의 1층에서 반지하로 이사를 했다

식구는 늘어났는데 집은 훨씬 좁아지고 안좋아졌다

그때의 집의 기억은 아직까지 꽤 뚜렷이 남아있다

아마 그때의 나는 그 집이 많이 창피했었던 같다


반지하 집의 현관 문은 보안이 걱정되는 비주얼이었다

창고에 달릴 법하게 생긴 문으로

철문도 아니고 불투명 유리가 붙은 문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오른쪽에 아주 작은 부엌이 있었고

거실없이 바로 복도가 이어졌다

작은 방 하나, 복도 끝에 안방이 하나.


식탁을 둘 공간이 없어

항상 간이 테이블로 식사를 했다


옆집에는 할머니 한분이 혼자사셨는데

안동 출신이라 안동할머니라 불렀다

안동할머니가 구워주는 김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그 집에서의 기억 하나는

아마도 내 죄책감의 기억인거 같다


엄마가 갓난쟁이 막둥이를 재우고 외출하신 뒤

아기는 금방 일어나 울었다


아무리 달래도 달래지지 않아 화가 나

안방에 아기만 두고 문을 닫고 나와버렸다

아기 울음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시간이 지나 문을 열어보니 아기는 울다 지쳐 잠들어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별일이 없어기에 망정이지

아기를 혼자 두고 나오다니 큰일 칠 뻔했다는 생각도 든다


그 단 한번 외에는 장담컨데

나는 아기를 많이 예뻐했다

아기를 많이 엎고 다녔고

똥 기저귀 치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날의 죄책감이 나를 많이 눌렀던 것인지

나는 막둥이 동생이 성인이 될때까지 참 많이도 어여삐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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