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략 설정
평소에는 무심히 흘러가던 시간이 ‘전이’라는 두 음절에 걸려 멈춰 버렸다. 벗어나려 할수록 숨이 막혔고, 아무 일 없을 거라 스스로를 달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끊임없이 최악의 장면을 그려냈다. 눈을 감아도 불안은 조용히 스며들어 가슴을 죄었고, 낮에는 일상을 이어가면서도 정신은 온전히 그 자리에 머물지 못했다. 마치 어디에도 닿지 못한 채 다른 공간 어딘가에 홀로 갇혀 있는 듯했다.
시간이 갈수록 두려움은 더 커져갔다. 발이 닿지 않는 물속에서 조용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돌이켜보면 지난 1년 중 가장 초조했던 순간은 검사 결과를 기다리던 그때였다. 결과가 나오기 전부터 온갖 가능성을 앞세워 불안을 키우고 있는 내 모습이 어쩐지 미련하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인데도 불안은 이미 현실처럼 내 일상을 잠식하고 있었다. 생각을 고쳐먹어야 했다. 전이가 됐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단단히 붙들어야 했다. 결국 이 일은 내 몫이었고 감당하는 것도 나 자신이었다.
2월 23일 운명의 날이 오고야 말았다. 대장항문외과 주치의 선생님과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선생님은 검사 결과와 치료 계획을 설명해 주셨다.
"검사 결과 다행히 전이된 곳은 없습니다만, 사이즈가 커진 림프절이 몇 개 보이는데 그것이 암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수술을 해봐야 정확히 알 수 있어요. 치료하면서 사이즈가 줄어드는지 지켜보죠. 검사상으로는 2기 말이나 3기 초로 보이는데 수술을 해봐야 확실히 알 수 있어요. 원래 암의 정확한 병기는 수술하면서 검사를 한 후에 결정되거든요. 치료는 방사선종양학과, 혈액종양내과와 협진을 하면서 할 거고요.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항암과 방사선치료를 먼저 하는데, 방사선치료가 주치료고 항암이 보조치료입니다. 수술은 그 이후에 대략 8주 후쯤 할 거고요.
직장암의 경우, 재발 가능성이 높은 2기나 3기인 경우에 수술 전에 보조적 치료로 흔히 방사선치료를 해요. 종양의 사이즈를 줄여서 항문을 보존하려는 목적이 커요. 또 항암을 동시에 하면 방사선의 효과를 높여서 국소 재발 확률이 낮아져요. 그만큼 생존율도 높아지겠지요. 아주 극히 드문 일인데, 방사선치료로 암이 사라지기도 하는데 그런 기적이 환자분에게 일어날 수도 있는 거니까 기대를 해봐도 좋겠지요.
방사선치료를 집 근처에서 받을 건지 이곳에서 할 건지 생각해 보셨나요? 지방에서 매일 다니는 게 힘들 텐데. 아, 그래요? 그럼 방사선종양학과와 혈액종양내과 진료를 보시고 치료에 대한 설명을 들으세요. 다음 주까지 모든 준비를 마치고 3월 4일부터 치료 시작할 수 있도록 합시다. 그때까지 컨디션 관리 잘하고 특히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수술에 대한 설명은 항암방사선 치료 끝나고 다시 합시다. “
굳게 움켜쥐고 있던 어깨가 풀리자 길게 숨이 새어 나왔다. 귓가를 울리던 심장 소리는 점점 잦아들고, 얼어붙었던 손끝에도 따스함이 번졌다. 머릿속을 흔들던 소용돌이 또한 차분히 가라앉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매달려 있던 두려움은 바람처럼 흩어지고, 온몸을 누르던 돌덩이는 눈 녹듯 사라졌다. 어느새 그 자리에 감사함이 선명하게 차올랐다.
(대장항문외과 주치의 치료 계획)
방사선종양학과 진료(23일과 26일)
눈빛은 부드러웠고, 말투는 느긋하면서 차분한 여자 교수님이었다. 학술상과 논문상 수상이력에 어울리는 학구적인 분위기가 신뢰감으로 다가왔다. 지난주에 검사했던 결과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내 현재 상태를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방사선치료를 하는 이유와 치료 계획, 부작용에 대한 설명을 이해하기 쉽게 말씀해 주셨다. “궁금한 거 있으시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또~ 또~ 또요."
답답할 틈을 주지 않으셨다. 어떤 질문이든 받아주고, 환자의 감정과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모습이 여간 고마운 게 아니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환자를 대하는 진심이 사랑으로 와닿아 방사선치료의 부작용 따위들이 만만해졌다. 대장항문외과 선생님이 숲을 보여주셨다면 이분은 숲에 있는 나무들을 보여주시는 의사 선생님이셨다.
(방사선종양학과 치료 계획)
-2월 26일 : 치료 부위(골반 주위)에 반영구적 점 문신을 하고, 방사선 모의치료와 CT 검사 진행
-3월 4일부터 총 25회 치료(월-금) : 매일 고정된 시간(오후 2시 40분)에 10-20분 치료 예정
-마지막 3회는 집중 치료
-매주 금요일마다 교수님과 진료 및 상담
26일에 두 번째 방사선종양학과 진료가 있었다.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하기 전에 체내 종양조직에 방사선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모의치료 작업을 한다. 환자 개인별 맞춤 치료로, 치료받을 때 자세를 정하고 치료 부위를 표시하는 등 정확한 치료를 위한 중요한 준비과정이다. 나는 종양조직에 많은 양의 방사선을 전달하는 동시에 주변 정상 조직에는 노출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CT를 이용한 모의치료를 했다. 병소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정맥 혈관에 조영제를 투여한다. 주사기를 손등에 연결했는데 눈물이 찔끔 나왔다.(세상에서 주사를 가장 무서워하는데 게다가 손등에 찔림을 당하는 건 처음이었다.)
“손등 로켓을 장착해 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임무 수행하러 가볼게요.”
태연한 척 간호사 선생님께 농담을 건넸다.
방사선 CT 모의치료실에서 치료 부위(골반 주위)를 정한 후 그 부위를 펜으로 표시를 했다. 바늘을 이용해서 점 문신을 하는데 약간 따가운 느낌 정도였다. 매일 치료할 때마다 표시된 치료부위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지워지지 않아야 한다. 깨알 같이 작은 점들 몇 개 있다고 문제 될 건 없었다. 치료 부위가 결정되면 나에게 가장 적합한 치료 계획을 컴퓨터를 이용해서 세운다고 했다. 치료 계획 작업은 의료진과 의학물리학자, 선량계측사, 방사선사 등이 긴밀하게 협조해서 환자에게 가장 좋은 치료 방법을 선택하도록 하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마지막으로 담당 의료진이 검토하고 승인하면 치료실로 계획안이 전달된다. 치료계획이 치료기 자동시스템에 입력되면 컴퓨터가 자동으로 정확하게 방사선 치료를 시행한다고 했다.
(방사선실에서 CT 모의치료를 할 때는 손등에 주사기를 연결했다.)
(혈액종양내과 치료 계획)
-3월 4일부터 방사선치료 종료일까지 세포독성항암제(1세대 항암제)
항암약 ‘젤로다’ 복용
-아침과 저녁, 하루에 두 번(1250mg*2회)
-약이 손에 닿지 않게 비닐장갑을 사용하면 좋다.
-식후에 바로 먹으면 울렁거림이 덜하다.
-항암제 설명 및 부작용 설명, 안내책자 제공
‘전이 없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림프절은 염증 때문에 부을 수도 있다고 하니 더는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머릿속은 단순해졌고 마음은 가볍게 부풀었다. 이제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으로 충만해졌다. 분명 신나는 일이 아니었지만 나는 이상하게 들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던 터널을 그토록 애써 걸어온 지난 일주일을 떠올리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마음이 가벼워지니 몸도 가벼워졌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D-day 6 나답게 파이팅을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