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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병원에서 첫 진료와 검사

겨울의 끝자락과 봄의 시작 사이에서

by ligdow

2024년 2월 16일. 서울 00병원 첫 진료가 있는 날이었다. 전날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무엇에 눌린 듯 몸도 마음도 답답했다. 깊은 숨을 쉬어보기도 하고 자세를 바꿔도 달라지지 않았다. 가위에 눌린다는 게 이런 걸까 하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정신은 또렷해졌다. 결국 조용히 암 관련 영상을 틀어놓고 뒤척이다가 아침을 맞았다.


밤새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를 환기시키려고 주방과 거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큰 창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잠시 얼굴을 내맡기며 서울 갈 준비를 서둘렀다. 오늘은 큰애 생일이다. 혹시 병원에서 검사를 하게 되면 밤늦게 내려올 수도 있을 것 같아 생일 파티는 하루 미루자고 했다. 하필 진료일과 겹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아직 곤히 자고 있는 그녀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말 대신 손끝에 마음을 담은 채 남편과 함께 집을 나섰다.


일주일 간격으로 두 번이나 금식을 하려니 하루 세끼를 꼬박 챙겨 먹던 나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배고픔에 괜히 짜증도 났고, 징징대는 나를 보며 남편은 그저 웃기만 했다. 웃을 일이 아닌데도 그 웃음에 묘하게 마음이 풀렸다. 우리는 각자 찾아본 암 관련 정보를 나누고 앞으로의 일정을 조율하며 병원으로 향했다. 00병원 암병원까지는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고, 운 좋게 같은 건물 지하에 주차할 수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낯선 긴장감이 스쳐갔다. 다행히 여러 차례 안내받았던 내용을 이미 숙지하고 있었기에 영상 CD와 진료의뢰서, 조직검사 결과지를 해당 부서에 차례로 제출할 수 있었다.





암병원 1층, 대장항문외과 000 교수 진료실 앞에 도착했다. 긴 복도 끝 대기 공간에는 빈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의자에 앉은 사람들 사이로 조용한 한숨과 낮은 기침 소리가 흘렀고 그마저도 묵직하게 들렸다. 갑자기 숨이 가빠지더니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남편에게 들릴까 싶어 괜히 복도를 천천히 오가며 진정하려 애썼다. 간호사가 환자 이름을 부를 때마다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멀쩡하던 다리는 이유 없이 힘이 빠져갔다. 낯선 공간, 낯선 사람들, 그리고 곧 마주할 의사. 그 모든 것이 나를 옥죄었다. 진료실 문 옆에 설치된 대기 화면을 바라보며 미리 준비한 질문들을 머릿속에서 하나씩 되뇌었다.



드디어 간호사가 진료실 문을 열고 내 이름을 불렀다.

"000님이세요? 성함과 생년월일 알려주세요."

요즘은 진료 전에 이렇게 확인하는 모양이다. 간호사와 시선을 마주한 채 이름과 생년월일을 또박또박 말했다. 목소리가 약간 떨렸지만 최대한 태연한 척했다.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의사 선생님이 다시 묻는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두 번째 확인. 손에 쥐고 있던 접수증까지 내밀어 정보를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진료가 시작됐다. 사소한 절차였지만 그 짧은 순간마저 내게는 긴장되는 과정이었다. 의자에 등을 붙이고 앉으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000 환자분, 대장내시경 검사를 하셨네요. 직장에 있는 이것이 암으로 보이고요. 조직 검사에서 직장암이라고 나왔네요. 제가 직장수지검사를 해야 하니 침대에 올라가서 옆으로 누우세요. 벽에 있는 안내대로 자세를 취하세요."

"제 손끝에 만져지는 게 암입니다. 느껴지죠? 검사를 해서 정확하게 진단을 내려야 치료 계획을 잡을 수 있어요. 그러려면 추가적인 검사를 해야 하는데 지방에서 오셨네요. 검사를 다른 날 잡고 다시 오게 되면 그때까지 환자분이 많이 힘들 거예요. 불안하고 걱정하느라 밥도 잘 못 먹고 살 빠지고 잠도 못 잘 거예요. 그러니 힘들더라도 오늘 검사를 다 하고 갑시다. 혹시 금식하셨나요? 환자분 생각은 어때요? "


"네, 오늘 검사할게요."


" 이 책자에 치료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와있어요. 여러 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직장암의 경우 선항암방사선치료를 하고 6-8주 후에 수술을 합니다.

20CM 정도 잘라낸다고 보면 돼요. 일단 표준치료는 이렇다는 정도만 알고 계시고, 검사 결과 나온 후에 다시 자세한 얘기를 하도록 합시다.

방사선 치료는 4-5주 정도 매일 받아야 하는데, 10분 정도 걸려요. 지방에서 서울까지 매일 다니는 게 힘들면 집 근처 병원에 의뢰를 해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해볼게요. 일단 그 부분도 생각을 해보세요. 오늘 검사 잘 받고, 너무 불안해마시고 일주일 후에 결과 볼 때 봅시다. 이분 오늘 검사 다 하실 수 있도록 예약을 잡아드리세요. 검사 결과 날짜에 맞춰서 방사선종양학과와 혈액종양내과 진료 예약도 해드리세요.”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환자를 배려하는 마음 때문일까, 외과 전문의로서의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빠른 판단력과 간결한 소통 덕분일까, 아니면 병원 내에서 맡은 높은 직책이나 수술 환자가 한 명 더 늘어난다는 현실적 이유 때문일까.

어떤 까닭이든 질문이 필요 없을 만큼 설명은 명확했고 추진은 단호했다. 이상하게도 답답함이나 아쉬움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아, 이제 진짜 시작이구나.’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스쳤다. 안갯속을 헤매다 누군가 손을 잡아 이끌어 주는 듯,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오늘 검사는 가슴 X-ray, 심전도, 혈액, 소변,

복부와 골반 CT 흉부와 가슴&심장 CT, MRI였다.

CT검사는 처음이었다. 검사 직전에 물을 세 컵 마시고 주사실로 들어갔다. 간호사는 정밀한 검사를 위해 정맥으로 조영제를 주입한다는 것과 부작용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주사기를 팔에 꽂았다. 검사는 원통형 기계에 누워서 진행됐다. 대략 10분 정도 걸리며 검사 도중에 움직이면 영상이 흐릿하게 나올 수 있으니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했다. 숨을 조심스레 쉬며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순간 "조영제 들어갑니다."

3초쯤 지났을까, 갑자기 입안이 화끈해지고 동시에 아랫배 아래쪽으로 뜨거운 기운이 확 올라왔다. 예상치 못한 감각에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입으로 빠르게 숨을 내뱉자 불편함이 조금 가셨다. 하지만 생식기 쪽에 퍼진 열감은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혹시나 소변을 본 건 아닐까 하는 걱정까지 들 정도였다. 그 느낌은 생각보다 짧았다. 10초 어쩌면 15초 정도쯤. 열감이 빠져나가고 나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멀쩡해졌다. 순간적인 일이었지만 낯선 자극과 몸의 반응이 겹치며 마음은 잠시 크게 흔들렸다. 검사는 계속되었고 나는 숨소리마저 조심스럽게 내쉬며 끝나기를 기다렸다.


MRI 검사도 처음이었다. 당일 검사를 진행하다 보니 병원 내에서 바로 촬영이 어려워 근처 연계된 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낯선 병원의 어두운 복도와 조용한 대기실, 어딘가 기계적인 분위기 속에서 몸보다 마음이 먼저 긴장을 했다. 잠시 후 원통형 기계 안에 누워 검사가 시작됐다. 몸을 고정시키고 천장을 바라본 채 움직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몇 분 간격으로 들려오는 기계음은 규칙적이지만 날카로웠다. 귀를 막고 헤드셋을 썼는데도 소음이 마치 뼛속까지 파고드는 것 같았다. 울퉁불퉁한 파장이 머리를 때리는 듯 했고, 고막이 찢어질까 걱정이 될 만큼 날이 선 소리였다. 검사 중에는 움직이지 말고 잠들지도 말라는 당부를 받았다. 자칫 무의식 중에 몸이 흔들릴 수 있어서라고 했다. 긴장해서인지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오는데 이상하게도 졸음이 쏟아졌다. 나도 모르게 감겨오는 눈을 억지로 뜨며 '검사 끝나면 뭐부터 먹을까' 라는 생각으로 의식을 붙잡았다. 검사하는 30분은 마치 30시간처럼 길었다. 배 속에서 울리는 꼬르륵 소리와 허기에 온 신경이 집중돼 있었다. 하루 종일 먹을 생각뿐이었고 어떤 음식으로든 이 공허함을 채우고 싶었다.


아침 8시에 집을 나섰다가 12시간 만에 돌아왔다.

검사가 끝나고 나니 온몸이 탈진한 듯 무거웠다.

긴 하루였지만 진료와 검사를 한 번에 끝냈다는 사실이 마음을 한결 가볍게 했다. 일주일 후면 검사 결과가 나오고, 그에 따라 치료 계획도 세워진다 했다. 몸은 지쳐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정신은 홀가분했다. 집에 도착해 남편이 끓여준 흰 죽을 먹고 곧바로 침대에 쓰러졌다. 다행히 두 검사 모두 조영제 부작용은 없었다.

다만 ‘조영제는 소변으로 배출되니 24시간 안에 물을 1.5~2리터 마셔야 한다’는 간호사의 말이 자꾸 맴돌았다. 깊이 잠들지 못한 채 물을 챙겨 마시고 화장실을 오가며 내 안에 남겨두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의 일들이 꿈처럼 아득했지만 나는 분명 한 걸음을 내디뎠다는 확신이 들었다.






CT와 MRI 검사에 대한 영상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올려본다.

(병원 홍보 절대 아닙니다.^^)


https://youtu.be/KuvvROd0SGw?si=hLjRMYdERFikaTku



https://youtu.be/cUQb6KU272I?si=J0BWHpniEAgYMfno



https://youtu.be/_sXPQ_2dM1c?si=4pAKc0p2brt2FC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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