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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이 사라지다-3

수술 or 지켜보기, 선택의 기로에서

by ligdow



5월 31일 대장항문외과 진료

중요한 순간이라 남편이 휴가를 내고 함께 서울에 갔다. 긴장과 기대가 뒤섞인 마음으로 진료실 문을 열었다. 주치의 선생님은 연결된 두 곳의 진료실을 오가며 환자들을 보고 있었다. 전공의 파업으로 진료 업무가 늘어난 탓일까. 눈가에는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워졌고, 미간에는 깊게 파인 주름이 피로를 말해주고 있었다.



“000님, 내시경 검사와 조직 검사 결과에서……

어? 암이 없어졌네요. 지난 2월 결과와 비교해 봅시다. 여기, 이게 그때의 암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없네요. 사라졌어요. 조직 검사 결과에서도 염증만 있고 암세포가 발견되지 않았고, CT와 MRI 검사에서도 암이 있었던 부위에는 흔적 정도만 남아 있네요. 정말 놀라운 결과입니다. 선항암과 방사선 치료가 아주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음……”



의사 선생님은 말을 멈추고 2분 남짓 조용히 컴퓨터 화면을 응시했다. 사전에 확인 한번 못한 채 이제야 환자 차트를 처음 보는 듯한 눈치였다. 마우스를 바쁘게 움직이며 여러 영상과 기록을 빠르게 넘겨 보고 있었다. 사라진 암을 어떻게든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듯, 모니터 속을 헤매는 선생님의 눈동자에서 의심과 확인 사이의 치열한 싸움이 느껴졌다.



진료실 안에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며칠 전에 방사선종양학과 교수님께 들어서 이미 검사 결과를 알고 있지만, 주치의 선생님 앞에 앉으니 상황은 또 달라졌다. 그분이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지금까지’와 ‘이제부터’가 갈릴 수 있는 순간이었다. 기대보다는 조심스러운 마음이 더 앞섰다.



예상했던 말이 나올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심장이 속도를 높였다. 등과 어깨는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고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워졌다. 마치 몸 전체가 판결을 기다리며 경청하고 있는 듯 했다.



“침대에 올라가서 옆으로 누워보세요. 직장수지검사를 다시 해봅시다. 이번에는 아예 만져지지도 않는 것 같네요. 모든 검사 결과가 좋으니 당연하겠지만요.”


자리에 앉은 선생님은 다시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며 마우스를 바쁘게 움직이셨다. 그리고는 말씀을 이어가셨다.


“젊은 나이라서 다시 암이 자라면 위험할 수 있으니 수술을 진행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수술해서 확인하면 암이 사라졌다고 나올 것 같긴 해요. 그렇지만 이런 비슷한 경우에도 나중에 한두 명은 다시 암이 자라나기도 해요. 현미경으로 안 보일 정도로 줄어든 세포도.

이런 경우에는 지켜보는 사람도 있어요. 나중에 수술해도 100명 중에 90명은 늦지 않은데, 10명은 암이 커지는 경우가 있어서 그게 무서운 거죠.

Pet CT를 찍어서도 아무것도 없으면 100% 암이 없을 가능성이 높아요. 지금까지의 여러 검사 결과가 저 정도면 Pet CT 결과도 좋을 거예요.


환자분의 경우 이 정도면 수술 안 하고 추적검사 하다가 다시 암이 생기면 그때 수술을 하겠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예요. 참 어렵네요. 젊어서요. 확률 높은 치료를 한다면 수술을 하는 게 맞거든요. 너무 반응이 좋아서 걱정이 생겼네요. 선택이 생겨버려서 고민이네요.


본인이 수술을 안 하겠다고 하면, 한 달 후에 검사를 하고 그 후로는 3개월 단위로 검사를 하면서 경과를 볼 거예요. 내가 이런 경험(수술을 안 하고 지켜보기를 한 환자들)이 20명 정도 되는데, 그중에 2명은 결국 수술을 했어요. 나머지 18명은 여전히 괜찮은 상태고요. 그분들은 모두 70-80대 분들이었어요. 그런데 환자분은 이제 나이 50이니까 재발 위험성이 조금 더 높고 선뜻 그러라고 하기가 애매해요.


고민이 될 때는 확률 높은 방법을 선택하는 게 맞아요. 원래는 수술이 원칙인데 환자분은 이렇게 좋은 결과로 수술하고 싶지 않죠? 삶의 질을 생각해도 그럴 테고. 3일 날 입원할 때까지 고민을 해보고 수술 여부를 알려 주세요. 원칙은 수술인데 저는 권유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



주치의 선생님은 검사 결과를 확인하는 내내 놀라움과 당혹감이 교차하는 기색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영상을 다시 확인하고 잠시 말이 멈춘 순간들 사이로선생님의 속마음도 느껴졌다.





입원일까지는 사흘 남았다.

주말 동안 충분히 고민한 뒤 월요일에 입원 준비를 하고 병원에 와서 결정된 답을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실 줄 알았다. 대장내시경을 해주신 내과 선생님도 미리부터 희망 회로를 너무 돌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으니까.

그래서 더 뜻밖이었다.

원칙은 수술, 하지만 권유, 선택은 환자가.



표준치료 외에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들은 직접 선택하고 꾸준히 실천해 왔다. 식단, 운동, 대체치료, 수면, 마음 관리까지. 치료받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관리하는 사람으로, 내 건강에 대한 주도권을 갖고 노력해 왔다. 그런데 마지막 수술 앞에서 정작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가 내려야 한다는 사실이 혼란스러웠다.

그것도 단 3일 안에.



이렇게 감사한 결과를 두고 다시 선택을 고민해야 한다니. 그 고민이 너무 어렵고 또 너무 무거워서 기분이 가라앉았다. 수술을 하지 않고 지켜볼 경우, 1년 내 재발률이 50%라고 했다. 재발이 꼭 같은 자리에 생긴다는 보장은 없었다. 만약 지금보다 더 아래 항문 가까이에 암이 다시 생긴다면 그건 정말 최악이다.



차라리 깔끔하게 수술을 해버릴까. 그러면 이런 복잡한 고민도 매일같이 올라오는 불안도 사라질 텐데.

하지만 아니다. 수술 후 짧아진 직장의 길이로 살아가는 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다. 다른 암이었다면, 이 정도의 결과만으로도 망설임 없이 수술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직장암이었다. 삶의 질을 고려했을 때 그건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집에 내려오면서 남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문득 전문가 분들의 의견이 궁금해졌다.

꼭 뾰족한 해답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 지금 내 마음속에 얽혀 있는 복잡한 실타래를 조금이라도 풀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았다.



먼저 마포에 있는 암 요양병원에 전화를 걸어, 000 원장님과 통화가 가능할지 조심스레 여쭈었다. 원장님 진료 시간에 예약도 없이 갑작스럽게 드린 전화라 조심스러웠지만 흔쾌히 전화를 받아주셨다. 이어서 방사선 치료를 받을 때 입원했던 요양병원의 원장님께도 전화를 드렸다.



두 분의 차분하고 따뜻한 말들이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조금씩 가라앉혀 주었다. 무엇이 정답인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내가 바라고 있는 방향에 조금은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서울 병원에서 복사해 온 의무기록지와 영상 자료를 들고 집 근처 000 내과로 향했다. 선생님께 직접 조언을 구하고 싶었다. 다행히 병원 진료 마감 30분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조급한 마음으로 병원 문을 열고 접수를 했다.



“주치의 선생님이 수술을 하자고가 아니라 권유하셨다고요? 정말요? 저의 예상이 빗나갔네요.

외과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건, 검사 결과가 정말 좋다는 뜻일 가능성이 높아요. 그렇다면 정말 수술을 꼭 해야 할지 신중히 고민해볼 문제네요.

저라면, 저의 가족 중에 이런 일이 생긴다면......“


“일단 환자분과 비슷한 사례의 논문을 찾아보죠.”


선생님은 어김없이 세계적인 권위의 암 관련 논문을 찾아 차근차근 해석해 주셨다. 낯선 의학 용어도 이해하기 쉽게 풀어주시며 지금 내 상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해 주셨다. 그때부터 마음이 서서히 놓였다. 불안과 혼란 사이에서 흔들리던 중심이 단단해진 느낌이었다.


진료실을 나설 땐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는 환한 빛이 돌았고, 그 얼굴 그대로 남편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아주 많이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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