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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이 사라지다-2

드디어, 수술 전 검사

by ligdow



‘암이 사라졌습니다.’

그날 이후,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는 무한 재생 중이었다. 휴대폰 속 내시경 사진을 수십 번도 더 들여다봤다.

내 몸 안에 암 덩어리가 없다는 게 그저 신기했다. 그동안 혈변 한 번 없었는데 얘네들은 도대체 어디로 어떻게 사라진 걸까. 그게 또 신기하고 궁금했다.



어쨌든 눈에 보이던 암이 사라졌고, 그 덕분에 수술 후 추가 항암 치료를 하지 않아도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물론 수술 없이 끝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나흘 동안 마음을 다잡고 수술을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애초에 내 표준 치료 계획의 마지막 단계가 수술이었고, 암 치료에 있어 중요한 마무리였으니 잘 끝내기만 하면 된다는 마음이었다.





5월 20일.

수술 전 검사를 받으러 서울 병원으로 향하는 길, 몸도 마음도 가벼웠다. 마음을 비우니 긴장감은 없었고 오히려 차분했다. 검사 하나하나를 기다리며 수술 전의 나를 기념하려고 사진을 찍었다.


*CT(복부와 흉부), 심장초음파, 혈액 검사, X-ray 심전도, 소변 검사

*MRI는 본병원 전공의 파업으로 인해 2월과 마찬가지로 근처 연계 병원에서 진행했다. 본병원 검사 일정과 연결되도록 시간을 조율해 줘서 CT에 이어서 검사할 수 있었다.






“제가 사진을 찍어도 될까요? 기념으로 남겨두고 싶어서요.”

혈액 검사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으며 팔을 내밀면서 말했다. 사실 나는 주사기가 무섭다. 평소에는 고개를 돌리고 눈을 질끈 감기 바빴지만 이번에는 용기를 냈다. 나중에 책을 쓰게 되면 이런 장면도 필요할 것 같아서 처음으로 주사 바늘이 들어가는 팔을 찬찬히 바라봤다. 겁은 나지만 기록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암 진단을 받은 날만은 예외였다. 그날은 사진을 찍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기록 속 그 빈칸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가장 중요한 장면이 빠져 있는데 어떻게든 남겨야 할 것 같았다.

결국 지난 3월 병원 진료를 받던 날, 방사선종양학과 교수님께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렸다.



”선생님, 제가 책을 쓰려고 하는데요. 작년 2월에 암이 있었던 대장내시경 자료를 볼 수 있을까요? 가능하다면 그 화면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서요.”.


“그래요? 그럼 잘 나온 화면으로 골라볼게요. 이게 좋겠네요. 잘 찍어보세요.”



선생님은 흔쾌히 수십 장의 화면 중에서 가장 잘 보이는 장면을 골라 모니터에 크게 띄워주셨다. 덕분에 며칠 전에 발행한 ‘암이 사라지다-1’ 글에 그 사진을 담을 수 있었다. 번거로웠을 수도 있는 부탁을 기꺼이 들어주신 선생님께 참 감사했고, 마음 한편에 오래 걸려 있던 숙제를 마친 것 같아서 시원하고 다행스러웠다.





수술 전 검사는 무사히 마쳤다. 지난 2월처럼 이번에도 CT와 MRI 모두 조영제 부작용 없이 잘 지나갔다.

입원은 6월 3일 월요일, 수술은 6월 4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제 정확히 2주 남은 셈이었다. 검사 결과를 확인하는 진료는 5월 31일 금요일. 그날이 하루라도 빨리 오기를 바라는 마음은 정말 간절했다.



혹시라도 모든 검사에서 암이 보이지 않는다면……

자꾸만 그런 기대가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수술을 받아들이기로 했으면서도 어느새 희망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나중에는 그 감정을 신경 쓰기보다는 그냥 흐르게 두기로 했다.



사실 내가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지난 글에서도 몇 차례 언급했던 임시장루(임시 인공항문) 때문이었다. 물론 장루를 하지 않는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 가능성만 바라볼 수는 없었다. 수술 전 검사를 마치고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이어가면서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면, 장루에 대한 공부였다. 곧 다가올 현실이기에 이제는 진짜로 집중해야 했다.



나는 필요한 준비물들을 하나씩 챙기며 수술을 준비했다. 입원 기간은 일주일 정도 예정이라 남편은 그 기간 동안 휴가를 내기로 했다. 퇴원 후에는 지난번에 머물렀던 마포의 000 암 요양병원에서 한 달 정도 회복할 계획이었고, 미리 입원 예약도 해두었다. 모든 과정을 차분히 준비하며 다가올 시간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도 해나갔다.





그러던 중 서울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31일로 예정되어 있던 방사선종양학과 진료를 28일로 앞당기자는 내용이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검사 결과를 하루라도 빨리 볼 수 있다니 뜻밖의 기쁨이 밀려왔다. 더군다나 그 교수님은 모든 검사를 세심하고 차분하게 설명해 주시는 분이라 더욱 안심이 되었다.



5월 28일 방사선종양학과 진료

“000님, 그동안 잘 지내셨죠? 4월 8일 이후로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배가 아프시거나 항문 통증은 없으셨어요? 없으셨다니 다행이에요. 혹시 다른 불편한 곳은 없으셨나요? 그것도 다행이네요. 수술이 벌써 다음 주 화요일이네요. 지난번에 수술 전 검사를 하셨는데요. 결과 많이 궁금하시죠?


우선 기본 검사들 모두 이상 없어요. 모든 수치들이 정상 범위 내에 있어요. 환자분이 외부에서 검사해 오신 대장내시경 영상을 보면 암이 사라졌고, 조직 검사 결과에서도 염증 정도만 있고 암세포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나왔어요.


이제 중요한 CT와 MRI 검사 결과를 볼게요. 2월에 처음 검사한 것과 이번에 검사한 것을 나란히 비교하면서 볼게요. 이번 검사에서는 암이 보이지 않아요. 암이 있었던 자리에는 뿌리 정도가 흔적처럼 옅게 보이거든요. 림프절도 2월에는 약간 부어있는 것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거나 아주 작아졌어요.


전반적으로 치료 반응이 아주 좋게 나왔어요. 수술을 비롯한 앞으로의 계획은 3일 후에 주치의 000 교수님께서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거예요. 원래대로 수술을 진행하신다면 저는 수술 후 약 3주 뒤 외래 진료 때 다시 뵙게 될 거고요. 만약 수술을 하지 않고 경과를 지켜보시게 된다면, 두 달 후쯤 추적 검사를 한 후에 뵙게 될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주치의가 아니었기에 수술 여부에 대해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셨다. 확답은 피하셨지만, 내 질문에 조심스레 덧붙인 마지막 말씀이 마음에 깊이 자리 잡아 이후 나의 선택에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삶의 질을 생각했을 때, 이 정도의 좋은 결과라면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저는...... “

나에게는 가능성이라는 이름의 작은 문 하나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간절한 희망이 그 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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