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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한 연장전

어쨌거나 나는 reset

by ligdow


6월 25일 PET CT 결과 진료가 있는 날이다.

이번에는 분명히 깨끗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주치의 선생님은 익숙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고는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말없이 멈칫했다. 그리고 이내 조심스러운 말투로 결과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영상의학과에서는 원발암 부위에 아직 암이 남아 있는 걸로 보인다고 했네요. 다른 부위는 모두 깨끗해요. 여기, 이 주황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원래 암이 있던 자리입니다. 딱 이 부위만 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이건 염증 때문일 수도 있어요. PET CT는 염증에도 이렇게 반응할 수 있거든요. 지금까지의 모든 검사에서는 암세포가 발견되지 않았고, 제가 보기에도 이건 암이 아닐 가능성이 더 높아요. 조금 애매하지만 2주 후에 검사를 한 번 더 해보고 그때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게 좋겠어요.”


“7월 10일부터는 직장 내시경과 직장 MRI 검사를 외부에서 하지 않고 본병원에서 진행하도록 할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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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는 아무 일도 아닌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예상치 못한 충격에 잠시 휘청거렸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고, 그 실망 위로 설명할 수 없는 허탈감과 공허함이 밀려왔다. 앞으로 힘차게 내딛으려던 발걸음이 그 자리에서 잠시 멈춰 선 상황이 당혹스러웠다. 생각과는 다른 결과에 묘한 씁쓸함이 느껴졌다.



수술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내 마음은 이미 정리된 상태였다. PET CT 결과만 깨끗하게 나와준다면, 앞으로는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정기적인 추적 검사만 하며 지켜보면 되는 일이었다. 의사 선생님도 나도 그렇게 마무리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암이 있었던 바로 그 자리. 작은 흔적 하나가 지금까지 이어져온 흐름을 단숨에 멈춰 세웠다. 마치 한참을 달려와 종착지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누군가 갑자기 어깨를 붙잡고 말하는 듯했다. 아직은 아니라고...... 그 순간 그동안 공들여 쌓아 온 평정심에 잔잔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요양병원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멍하니 보다가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깔끔하게 끝나면 좋았을 텐데, 뭔가 찝찝하게 남아서 개운하지 않아. 또 검사를 해야 하는 것도 갑자기 정말 싫어진다.” 이때의 감정은 체념이라기보다는 기대가 어그러졌을 때 자연스럽게 밀려드는 실망과 피로 같은 것이었다. 끝이라고 믿었던 자리에서 다시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 그 막막한 기다림이 주는 긴장감과 무력함이 나를 짓눌렀다.



그동안 나는 그저 묵묵히, 하루하루 내 몸을 돌보고 마음을 살피며 나만의 루틴에 따라 충실하게 살아가는 데 집중해 왔다. 다른 것에 불필요하게 에너지를 쏟지도, 감정을 낭비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단순하고 단단하게 이어지는 일상이 내게는 곧 평온이었고 나는 그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예상과는 다른 애매한 결과에, 2주 후에 또 검사를 받고 다시 그로부터 2주 후에야 결과를 들을 수 있다는 말에 맥이 풀렸다. 한 달 가까이 또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을 축 처지게 했고, 설명하기 어려운 피로감이 밀려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어지는 검사에 대한 부담이 적지 않았다. 내가 받아야 하는 검사는 매번 장을 비워야 했고그 과정은 어김없이 체력을 소모시켰다. 음식 조절, 검사, 회복, 그리고 다시 음식 조절로 이어지는 반복은 단순한 절차가 아니라 매번 작은 긴장과 체력 소진을 감수해야 하는 고단한 여정이었다.

“검사가 사람 잡네.” 불과 얼마 전까지 농담처럼 웃으며 했던 말이 이번에는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뜻하지 않은 연장전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훨씬 깊은 상실감으로 다가왔다. 그날 저녁에 나는 요양병원 1인실에 조용히 틀어박혀 있었다. 커튼을 치고 불을 끈 채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마음도 감정을 추슬러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하는 사이에 시간은 제멋대로 흘러갔다. 휴대폰은 손 닿는 곳에 있었지만 누구의 메시지도 바깥세상의 소식도 알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었다.



식탁 위에 놓인 저녁은 손대지 않은 채 식어 있었고, 유기그릇 뚜껑 위에도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방 안에는 말없는 슬픔과 형용할 수 없는 공허함이 고요히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그 감정 속에 나를 맡긴 채 아무 말 없이 누워 있었다. 이 우울함이 잠시 나를 감싸 안아주길 바랐다. 그 안에서 잠시 쉬고 싶었다. 그냥 그렇게 있고 싶었다.

그렇게 잔잔한 어둠 속에서 조용히 밤을 건너는데 갑자기 서러움이 몰려와서 엉엉 울고 말았다.






하지만 다음 날이 되자 다시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것들이 있었다. 하루하루 쌓아온 나만의 루틴, 묵묵히 지켜온 시간들 그리고 오늘을 살아야 하는 분명한 이유들이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나니 어느새 내 얼굴에도 다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PET CT 결과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다른 부위는 모두 깨끗했고, 흔적이 남은 곳은 원발암이 있던 자리 단 하나뿐이었다. 우울할 이유보다 감사할 이유가 더 컸다. 그 사실이 고마웠고, 그 고마움이 다시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처음 암을 진단받았을 때, 지금과 다르지 않은 루틴으로 건강하고 즐겁게 살아오던 나로서는 충격이었다. 내 몸 안에서 그렇게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래서 암이 무섭다. 불확실성을 무기 삼아 조용하고 집요하게 나를 흔들기 때문이다.

무엇 하나 쉽게 결정할 수 없고 그 모든 선택의 무게와 책임을 감당하는 일은 결국 내 몫이다. 그래서 이 시간들이 때로는 고독하고 때로는 아주 처절하게 외롭다. 그렇지만 오늘을 또 살아내기 위해 결국 내가 나를 더 사랑하고 정성스럽게 돌봐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매번 잘 되는 것은 아니었다. 감정의 균형을 잡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버거운 날도 있었다.






7월 10일, 별일 없이 검사를 마쳤지만, 결과를 기다리는 2주 동안은 지루하고 예민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매번 겪는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유독 더 지치고 힘들었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극도로 예민해진 감정의 최고조였던 것 같다. 어쩌면 한여름의 무더위도 한몫했을지 모른다. 덥고 눅눅한 공기가 심리적인 피로와 겹치면서 나도 모르게 점점 더 예민해지고 날카로워졌던 것 같다.

그래도 가족들 앞에서는 최대한 평온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애썼다.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해야 나 자신도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디어 대장항문외과와 방사선종양학과 진료를 받는 날이었다. 나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수술을 하던 하지 않던 미련 없이 받아들이기로.



“MRI 결과를 보면 5월 검사 때보다 암이 있었던 뿌리도 훨씬 작아진 것으로 보입니다. 직장 내시경 검사와 조직 검사에서도 악성 종양은 발견되지 않았고요. 혈액검사와 종양표지자 수치도 모두 정상이네요.

전체적으로 봤을 때 ‘지켜보는 것’도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환자분도 그러기를 원하시죠? 수술하지 않고 지켜볼 경우에 첫 1년이 가장 중요해요. 재발 가능성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고요. 만약 갑자기 항문 통증이 심해지거나, 대변 양상이 변하거나, 복통이 생기면 지체하지 말고 바로 진료 신청해서 오세요.

수술을 하지 않아서 추적 검사를 조금 더 촘촘하게 해야 하니까 두 달 후, 9월 초에 합시다. “



수술 전 검사에서 암이 사라졌다는 결과로 수술과 지켜보기라는 두 갈래 길 앞에 서 있던 5월 31일.

PET CT 검사 후 또다시 검사를 하고 결과를 확인한 7월 24일까지, 그 두 달은 몸이 고단하던 항암과 방사선 치료의 시간보다 훨씬 더 버거웠다.

기다림은 그저 시간이 지나기만을 바라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시간이었다. 기대가 커질수록 불안도 함께 자라서 희망조차도 조심스럽게 품어야 했다. 이번 기다림은 생각보다 훨씬 나를 지치게 해서 마음이 좀처럼 편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 오랜 기다림 끝에서 내가 바라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지켜보기를 해도 좋겠어요.”

그 안에는 내가 견뎌온 시간과 기대, 두려움과 용기가 모두 담겨 있다. 안도의 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한동안 꼭 쥐고 있던 긴장과 걱정이 마침내 나를 떠나가고 있었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지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따뜻한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차올랐다. 기쁨이라기보다는 평온함 같은, 아니 그보다는 살아냈다는 확신 같은 뿌듯함이었다. 이렇게 나는 또 하나의 고비를 넘었다.








이제부터 새로운 시작이다.

완전 관해란 검사상 암이 보이지 않는 상태일 뿐, 내 안에 미세하게 남아 있을지도 모를 잔존암을 늘 경계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다스리기 위해서 이제 나는 나 자신의 치료사이자 관리사로 살아가야 한다. 몸과 마음 나의 모든 것을 스스로 돌보고 지켜내야 한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이 기적 같은 결과와 감사의 순간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다. 나는 이 시간을 견뎌냈고 결국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도 나는 나를 믿고, 나의 선택을 믿고, 나의 길을 묵묵히 걸어갈 것이다. 지금까지의 혹독한 암 체험 역시 내 삶의 일부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모든 과정을 감사하며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단순하고 단단하게,
오늘도 나는 맑음이다.
흔들려도 괜찮다.
나는 다시 맑아질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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