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엊그제 만난 ‘츠바키 문구점’을 읽으면서 누군가의 마음을 대신 써준다는 일이 얼마나 조심스럽고도 아름다운 일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 어젯밤에 문득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 의뢰인도 대필자도 모두 나 자신이었지만.
그 이야기를 적어보려 한다.
2016년 10월 중순, 아빠는 위암 4기 진단을 받으셨다. 간과 폐에도 일부 전이가 되어 수술은 어려웠고, 항암 치료만 가능한 상황이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항암 치료를 하면 1년, 하지 않으면 6개월 정도 살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아빠는 그 자리에서 망설임 없이 항암 치료를 시작하겠다고 결심하셨다.
아빠가 암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셨으면 하는 마음에 나는 그날부터 아빠 곁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병원에 모시고 다니고, 약도 꼬박꼬박 챙기며, 틈틈이 농사일과 집안일까지 돌보느라 하루하루가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무엇보다도 1500평 밭에 있는 비닐하우스 여섯 동에 가득한 풋고추가 큰 걱정이었다. 이틀에 한 번씩은 풋고추를 따서 박스에 담아 가락시장으로 보내야 했다. 농약도 때맞춰 뿌려야 하고, 논두렁 풀도 깎아야 하며, 밭에 김도 메야 하는 등 눈에 보이는 모든 일이 끝이 없었다.
아빠는 자신이 돕지 못하고 엄마 혼자 애쓰는 모습을 미안해하며 조용히 지켜보셨다. 그래서 내가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아빠, 옛날에 내가 대학 떨어지면 농사지으라고 하셨던 거 기억나? 그때 그냥 아빠랑 농사 지을 걸 그랬나 봐. 아빠랑~“
애교 섞인 말투로 아빠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해 드리려 애썼다. 몸은 고단했지만 아빠와 함께 보낸 그 시간들은 내게 참으로 행복한 기억으로 남았다.
아빠는 3주에 한 번씩 서울 병원에서 항암 치료를 받으셨고, 당뇨로 인한 여러 증상 때문에 읍내 내과와 안과, 동네 보건소를 오가며 약 처방과 치료도 꾸준히 받으셨다. 치료 외에 나는 아빠가 처리해야 하는 관공서 업무도 대신 보러 다니고, 틈틈이 엄마와 함께 농사일도 했다. 여기에 재산을 엄마에게 증여하는 일까지 겹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분주한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아침에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아빠가 너무도 안쓰러워 뭐라도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암 부작용으로 몸과 마음이 지쳐 쓰러질 듯한 아빠에게 위로가 되고, 다시 살아갈 힘과 용기를 드리고 싶었다.
바로 아빠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이만하면 잘 살아왔다”고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일.
그래서 나는 아빠의 삶을 글로 써드리기로 마음먹었다. 병마와 싸우며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시간 속에서도 아빠가 자신의 77년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느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빠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틈날 때마다 질문했고, 메모를 할 수 없을 때는 기억해 두었다가 기록을 하고, 또 질문과 메모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시간을 쌓아가며 나는 아빠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내 아빠를 정말 진심으로...
마흔이 넘어서 처음으로 아빠의 손을 잡고, 얼굴을 쓰다듬고, 등을 다독이고, 발을 씻겨드리며 그제서야 비로소 아빠라는 한 사람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아빠를 존경해 왔지만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단지 아빠니까 존경하는 마음과는 달랐다.
아빠라는 사람을, 한 인간으로 깊이 알아가며 생겨난 깨달음에서 비롯된 진짜 사랑이었다.
비록 자서전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짧고 부족한 글이었지만 마음만큼은 온전히 진심이었다. 아빠가 직접 쓰신 것처럼 문체를 다듬고, 읽기 편하시도록 글씨도 크게 하여, A4 여덟 페이지 분량의 글을 그동안 써두었던 짧은 글들과 함께 묶어 작은 책으로 만들었다.
노트 크기와 두께로 소박하지만 그래도 책의 모양을 갖춰 드리고 싶었다. 어찌어찌 아는 분의 소개로 서울에서 인쇄업을 하는 어떤 분께 부탁을 드려서 제본보다는 나은 품질로 30권을 인쇄할 수 있었다.
드디어 아빠께 선물을 드리는 날.
아빠 글의 제목은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하다’였다.
그날은 평소보다 더 서둘러 7시쯤 시골집에 도착했다.
5월 중순의 봄햇살이 안방 창문으로 가득 들어와 침대에 누워 계신 아빠 얼굴을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
“아빠, 짜잔~~ 그동안 아빠랑 나눴던 이야기로 내가 이렇게 책을 만들어 왔어.”
“그렇게도 옛날 얘기를 묻고 또 묻더니 글을 쓰려고 그랬던 거였어?”
놀라움과 웃음이 뒤섞인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아빠의 눈빛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엄마도 얼른 이리 오셔. 이번에는 아빠 이야기지만 다음에는 엄마 이야기도 써드릴게. 그러니까 삐지지 마시고. 이제 읽을게요. 두 분 다 마음 편히 먹고 들어주세요.“
나는 누워 계신 아빠의 손을 잡고, 옆에 앉아 계신 엄마를 사이에 두고 천천히 책을 읽어 내려갔다.
읽으면서 울지 않으려고 정말 많이 아주 많이 애를 썼다.
“그게 말이야~“
중간중간 엄마가 부연설명을 하시려고 해서 여러 번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했다.
엄마는 초반부터 눈물을 흘리시더니 나중에는 펑펑 우셨고, 아빠도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우리 막내가 글을 잘 쓰네.
지난번에 최우수상 받을 만했네. 고맙다. 혜정아.
그런데, 막내야… 내가 정말 그렇게 잘 살아온 게 맞을까? 네가 내 딸이라서 좋게 써준 거 아냐?”
“아빠, 무슨 말씀이셔.
이 글 들으면서 ‘어, 이건 아닌데’ 싶은 부분 있으셨어?
아빠가 느끼고 생각하시는 그대로 저도 똑같이 느꼈고 생각한 거예요. 내가 어릴 때부터 아빠, 엄마를 제일 존경한다고 말했잖아. 기억나시지? “
“그래, 맞아. 너는 항상 그랬지.
그래, 우리 막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고맙다. 나 진짜 잘 살았구먼. 하하하.”
“그럼요, 당연하죠. 자식이 아빠한테 잘 살아오셨다, 존경한다고 말하면 그건 진짜인 거예요.”
“치이. 당신 좋겠소. 부럽네.”
“엄마, 왜 그러시지. 제가 엄마도 존경한다고 했잖아. 박 여사님 사랑한다고.”
“엄마도 우리 막내 사랑하지.
너무 고맙고… 고생시켜서 미안하고… 흑흑...“
그렇게 우리는 웃으며 또 울며 아침을 보냈다.
아빠의 삶을 글로 옮기며 나는 알게 되었다.
그것은 사랑을 표현하는 일이자,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그 후 아빠는 침대 머리맡에 책을 두고
여러 차례 당신의 글을 읽으셨다.
그리고 9월 중순, 우리 집 근처에 있는 호스피스 병원으로 모시고 오는 날 아빠는
“막내야. 이거 챙겨가자.”
그곳에서 함께한 3주 동안에도
“막내야, 내 글 읽어줘.”
그렇게 여러 번 아빠는 당신의 삶과 마주하셨다.
읽어드리고 항상 얼굴을 쓰다듬으며
“우리 아빠 아주 잘 살아오셨어. 너무 멋지고 사랑스러워요. 사랑해 아빠“ 라고 말씀드렸다.
임종하시기 직전에도
아빠는 당신의 삶을 다 들으신 후
눈을 떠 나를 한 번 바라보시고
가족들을 둘러보신 후
주무시듯이 천국으로 가셨다.
아빠와의 대화 중에 나온 말들의 조각들을 엮어
프롤로그로에 담았다.
“막내야, 내가 쓴 것 같다. 신기하네.”
아빠는 참 좋아하시며 고맙다는 말씀을 아끼지 않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