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뒷마당 우물가 옆에 장독대가 있었다. 94년에 오래된 슬레이트 집을 부수고 벽돌집을 지으면서 장독들은 햇볕이 잘 드는 앞마당 모퉁이로 옮겨졌다. 크고 작은 독들이 질서 정연하게 줄을 서 있었다.
23년 봄에도 엄마와 고추장을 담갔다. 물론 나는 보조 역할이었지만, 남편은 영상을 찍어 나중에 혼자서도 해보라고 했다. 두 손이 바빠 그럴 경황이 없었고 나는 지금까지의 경험과 기억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했다.
언니와 오빠, 작은집 식구들은 각자의 몫을 챙겨 갔다. 나는 언제든 가져갈 수 있으니 먹던 것이 떨어지면 퍼 가겠다고 그냥 왔다. 사실은 가득 채워진 장항아리가 한순간에 많이 비워지면 엄마가 허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핑계로 엄마 얼굴을 한 번 더 볼 수 있었고, 고추장 가져가라는 애정 어린 잔소리를 듣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떤 해에는 내 것만 미니 항아리에 따로 담아 준 적도 있다. 물론 언니와 오빠들 몰래라는 귀띔을 해 주셔서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23년 7월 중순, 엄마는 폐렴으로 입원하셨고 3주 만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 사이 멀쩡하던 고추장은 모두 망가져 있었다.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장이 망가진다는 옛말(=집안에 우환이 있으면 장맛이 변한다)이 있는데, 그해 여름에 그 말을 처음으로 믿게 되었다.
이맘때쯤이면 엄마 머릿속은 이미 고추장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양을 얼마나 할지, 이번에는 누구에게 더 줘야 하고 누구에게는 덜 줘도 되는지 사람의 이름을 장독처럼 하나씩 꺼내 놓았다. 들기름을 챙겨 주듯 고추장도 꼼꼼하게 헤아렸다. 엄마에게 고추장은 맛뿐만 아니라 사람을 생각하는 일이었다.
-2014년 3월, 시골집에서 고추장 담근 날
-2013년 3월, 세 살이었던 둘째가 외할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내 휴대폰으로 귀한 장면들을 남겼다.
암 진단 이후 음식 관리를 하며 최소한의 양념만 사용했고, 그 기본인 고추장과 된장, 간장을 다시 살펴보았다. 엄마가 주신 된장과 조선간장은 아직 여유가 있었지만 문제는 고추장이었다. 반찬 몇 번하면 금세 바닥날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해졌다.
특히 둘째는 고추장 맛에 예민했다. 다른 고추장을 식탁에 올리면 평소에 먹던 맛과 다르다는 것을 금세 알아챘다.
“엄마, 외할머니 고추장 아니지? 다 먹었나?“
어떤 때는 뜬금없이
“외할머니 고추장 얼마나 남았어? “
그냥 먹어도, 요리에 넣어도 늘 원하는 맛을 내는 엄마의 고추장.
남편과 아이들에게 그 맛을 계속 전해주면서, 이번 기회에 내 고추장도 따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김치처럼 고추장도 직접 담가 먹기로 했다.
재료는 몇 달 전에 준비했다. 실패하면 다시 하면 되니까 겁은 나지 않았다. 원래 몇 번의 실패를 거쳐야 비로소 손맛이라 부를 수 있는 맛이 생기는 법이니까.
다만 고추장용 고춧가루 값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긴 했다.
어느 일요일 아침, 나는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엄마와 커다란 고무대야에 하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마지막까지 잘 풀리지 않는 고춧가루 덩어리를 두 손으로 천천히 풀어 가는 동안 내 손 위에 엄마의 손이 겹쳐지는 것 같았다.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두 번 담갔다.
처음은 전통 방식으로, 다음에는 우리 엄마표로.
처음 것은 요 며칠 먹고 있는데 맛있다고들 했고, 나중에 담근 것은 일단 둘째에게서 나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제 나는 내가 담근 고추장을 먹으면서 엄마 우리 박여사님과 이야기를 할 것 같다. 엄마 손맛을 이어 가고 있는 중이라고, 나름 성공했으니 칭찬해 달라고.
조만간 미니 항아리를 사러 시장에 가야겠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1월 11일, 첫 번째 고추장은 나를 위한 것이다.
재료들을 끓이고 식히고 휘젓고 녹인다.
고춧가루를 체에 안 내리고 그냥 들이부었더니 덩어리가 져서 결국은 마지막에 손으로 해결했다. 엄마랑 함께 하던 그때처럼...
막 잠이 깬 둘째가 사진을 찍어줬다.
그와 그녀들이 늦잠을 자는 동안, 나는 중요한 임무를 끝냈다. 뿌듯한 마음으로 이름 중 이니셜 한 글자만 남겼다. 베란다에 며칠 두었다가 스텐과 유리용기에 담아 냉장고에 넣었다.
며칠 전에는 흑가리비를 쪄서,
오늘은 수육과 살짝 찐 부추와 함께 먹었다.
고추장은 그와 그녀들의 식탁에서 인기리에 사라지는 중이다.
1월 18일 두 번째, 그와 그녀들을 위해 우리 엄마 방식으로 담근 고추장이다. (재료는 신비주의 모드)
대충 뒷정리를 하고 한숨 돌리며 보자기를 펴고 바닥으로 내려왔다. 본격적으로 섞어보려던 순간을 운동 다녀온 남편이 찍어줬다. 내 것보다 조금 되직한데 나중에 먹을 때 손 봐도 되니 일단 그냥 두려고 한다.
지금은 베란다에서 햇볕과 바람을 쐬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