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 로지 May 17. 2022

[전직사서가 쓰는 서평 아닌 서평] 밝은 밤, 최은영

그 시대를 살아낸 많은 삼천이와 새비에게

좋아하는 작가의 책은 신작이 나오면 바로 읽는 편이다. 읽는 이유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정유정 작가의 책. 늘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보는데도 무섭고 섬뜩하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어떻게 이런 생각을 글로 풀었지. 그렇게 그 작가의 새로운 이야기에 기대하며 읽는 것이 하나. 또 하나는 작가의  좋아하는 문체를 느끼고 싶어 읽는다. 이야기가 달라져도 작가의 문체는 늘 같은 편이고, 그런 문체가 마음에 들면 계속해서 그 작가의 책을 읽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최은영 작가의 문체를 좋아한다. ​


지인 중 최은영 작가의 소설 중 제일 유명한 <쇼코의 미소>를 읽었는데, 조금 우울했다는 평을 들은 적 있다. 내가 쓴 것도 아닌데 속상해서 기억에 남는다. 보통 작가나 책의 첫인상이 결정되면 잘 바뀌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최은영 작가는 그렇게 기억되겠지 싶었다. 하지만 <밝은 밤>은 조금 다르다. 어렵게 쓴 글이라는 것을 알아서 그런가. 특유의 절제되고 담담하지만 따뜻한 문체로 희령에서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


<밝은 밤>은 남편의 외도로 이혼하고 내려간 희령에서 할머니를 만나고 할머니에게서 엄마, 할머니, 증조할머니, 그리고 새비 아주머니, 개성에서의 이야기, 피난을 내려오던 이야기를 듣는 과정이 담긴 책이다. 요즘 여성을 주체로 이야기를 풀어낸 책이 꽤 눈에 많이 띄는데, 작가들의 태도와 시도에 박수를 보낸다. 밝은 밤 역시 여성으로서 그 세대를 살아낸 이야기가 녹아있고, 너무 깊게도 너무 얕게도 아닌 적당한 깊이로 그 당시의 삶을 보여준다. ​


최근 <천개의 파랑>을 읽고 많이들 울었다고, 심지어 오열했다고 했는데 나는 눈물까진 아니어서 감정이 메말랐나 했지만 명숙 할머니가 쓴 편지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보고 싶지만 보고 싶다 말하지 못하고, 곁을 내어주고 싶지만 곁을 내어주지 못하고, 보러 와달라고 할 수 있지만 애써 말을 참는,  이 얼마나 애틋한 사랑인가. 사랑에 다양한 형태가 있는 걸 알고 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사랑 외에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을 이 책에서 발견했다. ​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상상을 해본다. 희자 할머니와 할머니가 손을 맞잡는 장면, 같이 희령의 바다를 보고, 정리한 할머니 집에 돌아와 지연과 함께 사진을 보는 장면까지. 책을 읽는 동안 마치 다큐에서 실존하는 인물처럼 느껴졌다. 희령 역시 어딘가에 있는 바다가 예쁜 동네 같았다.  시대를 살아낸 많은 삼천이와 새비에게 경의를 표한다.

"내게는 지난 이 년이 성인이 된 이후 보낸 가장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 시간의 절반 동안은 글을 쓰지 못했고 나머지 시간 동안 <밝은 밤>을 썼다. 그 시기의 나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누가 툭 치면 쏟아져 내릴 물주머니 같은 것이었는데, 이 소설을 쓰는 일은 그런 내가 다시 내 몸을 얻고 내 마음을 얻어 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_ 작가의 말에서​


'넌 사랑받기 충분한 사람이야.' 어느 날 말을 이을 수 없어 눈물만 흘리던 내게 지우가 그렇게 말했다. '앞으로는 내가 널 더 많이 사랑할게. 이제 사랑받는 기분이 뭔지도 느끼며 살아.'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듯이. 어떤 이유 없이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나는 지우를 보며 알았다. p102


-아재빈 키가 크구 목도 길구, 항상 웃구 밥도 잘 자시구.

-듣기 좋구나.

-끝이 아니라요. 아재비랑 있으면 우리 어마이랑 아바이랑 모두 웃구, 새비 아즈마이두 웃구, 희자도 웃구, 아재비가 오기 전이랑 달라요. 아재비는 해 같은 사람이라요. 낭중에도 해를 보믄 아재비가 생각날 것 같아요.

- 말하는 거 보라우. 영옥이는 낭중에 시인을 해야갔어.   111p​​


영옥아, 내레 너를 처음 봤을 적부터 더러운 정이 들 줄 알고 있었다. 저리 가라면서 너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는데도 너는 강아지마냥 내게 오더구나. 세상이 뒤집히구, 나도 죽을 날이나 기다리며 살고 싶었는데.. 네가 나를 비웃어도 할 말이 없어.

내 너를 전쟁통에 만났다. 이제 너를 언제 볼 수 있을까. 내 살아있을 때 너를 다시 볼 수 있을까. 223p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