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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 로지 May 17. 2022

[전직사서가 쓰는 서평 아닌 서평] 천개의파랑,천선란

지금 우리에게도 콜리가 필요하다

이상문학상 단편집은 좋아한다. 하지만 한국 과학 문학상을 받은 소설을 읽은 적은 없다. 원래 판타지나 SF소설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작가의 이름 또한 처음 듣는 이름이니, 누군가에게 추천을 받지 않았다면 내 손으로 고르지 못했을 책이다. 그리고 추천을 해준 사람에게 몹시 감사하다. ​


장편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한 편의 영화처럼 이야기가 물 흐르듯 흘러간다. 콜리와 투데이만 구현해낼 수 있다면 영화화해도 좋을 것 같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열심히 머릿속으로 캐스팅을 했다. ​


 <천 개의 파랑>에서는 미래에도 여전히 경마 경기가 계속되고 있다. 그렇게 발전이 되었는데도 실제 말이 뛰는 경기라니. 인간은 참 잔인하도다. 경주마 투데이와 더 빨리 달리기 위해 개발된 휴머노이드 기수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기수를 만들며 칩이 바뀌는 사고로 인해 인간의 단어가 많이 탑재되는 휴머노이드 콜리,  그리고 그 콜리를 우연한 계기로 발견하고 고치게 되는 연재와 그 과정에서 그동안 외면하던 서로의 상처를 직접 보고, 콜리를 통해 치유받는 연재의 가족들의 이야기다. 천선란 작가는 스페이스 오페라를 소재로 한 소설을  거의 다 써놓고 가짜라는 느낌을 받고 더 이상 쓰지 않았다고 했다. SF도 가짜고, 소설도 가짜인데 왜 그런 생각이 들까 라는 고민을 많이 했다고 했는데, 작가의 고뇌가 있었기 때문인가.  <천 개의 파랑>은 SF소설이라고 하기엔 쉽게 읽히고,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가짜가 아닌 진짜의 느낌을 받게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미래와 과거를 동시에 보게 한다.

좋은 점을 한 가지 더 말하자면,  미래와 과거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인물로서 보게 하는 점이다. 챕터의 구성이 인물의 이름으로 되어있으니, 당시 상황을 그 인물에게 집중하여 이해할 수 있어 더 깊이 이해가 가능하고, 또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에게 애착을 만든다. 연재는 어린 나이에 어른이 된 모습이 안쓰러웠고, 은혜는 세상의 짐을 일찍 짊어진 듯하여 속이 상했다. 외로움을 혼자 외롭게 이겨내야 했을 보경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린다. 그래서 그 가족이 콜리를 통해 조금 환해진 순간순간을 발견할 때마다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무언가를 통해 외면하고 있던 상처를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간은 어떠한 매개체 없이 상처를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니까. 지금의 우리에게도 콜리가 필요하다. ​​



"그리움이 어떤 건지 설명을 부탁해도 될까요?"

콜리는 이가 나간 컵에서 식어가는 커피를 쳐다보며 보경의 말을 기다렸다. "기억을 하나씩 포기하는 거야." 보경은 콜리가 아닌 주방에 난 창을 쳐다보며 말했다. "문득문득 생각나지만 그때마다 절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거야. 그래서 마음에 가지고 있는 덩어리를 하나씩 떼어내는 거지. 다 사라질 때까지."  204P​


"그리운 시절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에서 행복함을 느끼는 거야." 보경의 눈동자가 노을빛처럼 반짝거렸다. 반짝거리는 건 아름답다는 건데, 콜리 눈에 그 반짝거림은 슬픔에 가까워 보였다. "행복한 순간만이 유일하게 그리움을 이겨." 그리움이란 그런 것이구나. 콜리에게도 그리워할 순간이 생겼다. 투데이와 주로를 달릴 때다. 투데이가 행복해하는 진동을 느끼면서. 205P

슬픔을 겪은 많은 사람들의 시간은 어떻게 흐르는 것일까. 사실은 모두 멈춰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지구에 고여버린 시간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그 시간들을 흐르게 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그렇다면 아주 천천히 움직여야겠네요." 콜리가 보경을 향해 조금 더 몸을 틀었다. "멈춘 상태에서 빠르게 달리기 위해서는 순간적으로 많은 힘이 필요하니까요. 당신이 말했던 그리움을 이기는 방법과 같지 않을까요? 행복만이 그리움을 이길 수 있다고 했잖아요. 아주 느리게 하루의 행복을 쌓아가다 보면 현재의 시간이, 언젠가 멈춘 시간을 아주 천천히 흐르게 할 거예요."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배우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이건, 하늘을 보며 파랑 노랑을 떠올렸던 것과 비슷한 거예요. 연재가 저를 보고 이상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고요."

"모든 휴머노이드가 너 같지는 않을 텐데."

"저는 실수로 만들어진 거라고 연재가 말했어요. 저를 결정하는 제 안의 칩 하나가 다른 휴머노이드와 다르다고 했어요."

"연재는 실수가 기회와 같은 말이래요." 286P

​​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아요. 저들이 하는 말을 듣지 않아도 돼요. 당신은 당신의 주로가 있으니 그것만 보고 달려요. 자신의 속도에 맞춰서요. 신경 쓰지 마요, 저 소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굳이 들을 필요 없어요. 모든 것을 듣고 살 필요 없어요. 352P


나는 세상을 처음 마주쳤을 때 천 개의 단어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천 개의 단어로 다 표현하지 못할, 천 개의 단어보다 더 무겁고 커다란 몇 사람의 이름을 알았다. 더 많은 단어를 알았더라면 나는 마지막 순간 그들을 무엇으로 표현했을까. 그리움, 따뜻함, 서글픔 정도를 적절히 섞은 단어가 세상에 있던가. 천 개의 단어만으로 이루어진 짧은 삶을 살았지만 처음 세상을 바라보며 단어를 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천 개의 단어는 모두 하늘 같은 느낌이었다. 좌절이나 시련, 슬픔, 당신도 알고 있는 모든 단어들이 전부 다 천 개의 파랑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파랑파랑 하고 눈부신 하늘이었다. 35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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