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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 로지 May 19. 2022

[전직사서가 쓰는 서평 아닌 서평] 피프티피플, 정세랑

51명의 연결고리

한창 정세랑 작가에 빠져서 정세랑 작가의 책을 몰아서 읽던 시기가 있었다. 판타지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독특한 세계관에 매료되어 계속해서 읽었다. 넷플릭스 드라마화된 <보건교사 안은영>이나 <지구에서 한아뿐>, 가장 깊이 있는 내용을 담았던 <시선으로부터,> 재밌게 읽었지만 누군가가 정세랑 작가의 책중 무엇을 제일 좋아하냐 묻는다면 나는 <피프티 피플> 말할 것이다.

<피프티 피플>은 제목과 달리 51명의 사람이 나온다. 장소는 병원이고, 병원에서 일을 하거나 병원을 찾는 사람들, 병원 주위를 맴도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챕터 구성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이고, 50명이 넘는 인물들이 등장하기에 무척이나 짧은 단편처럼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단편집과 다른 점은 읽어보면 인물과 인물이 연결이 되는 부분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인데, 이 점이 책을 읽는데 무척이나 재밌는 요소로 느껴진다. “어, 이 사람 앞에 나왔던 그 Bar를 운영하던 사람인데”, “이 할아버지는 병원에서 일하는 그 할아버지잖아”라고 무언가 연결고리를 찾을 때마다 다시 책의 앞으로 돌아가 확인을 하기도 하고, 찾아냈다는 사실에 혼자 뿌듯해하기도 한다.


워낙 많은 인물이 나와 한 명 한 명 모두를 기억에 담을 수 없지만  그중 인물 하나를 선택해봐라 한다면 하계범. 매일매일 죽는 사람들은 옮기는 일을 하는 할아버지다. 두 사람이 나누어하던 일이었는데 한 사람이 그만두면서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숙직실에 머물며 두 사람의 몫의 일을 하던 할아버지. 그리고 한 사람이 감당해내니 모른 척하던 병원. 당연한 것을 요구하면서도 고맙다 말하던 할아버지. ​


누군가는 이 책에서 본인을 발견할 수도, 내 옆의 사람을 발견할 수도, 내 미래의 모습을 또 과거의 모습을 발견할지도 모르겠다. 이 51명이란 인물에게 하나하나 성격을 부여하고, 스토리를 만든 작가가 존경스러울 뿐이다.  그저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있을 수 있는 단편적인 이야기일 뿐인데 책 한 권을 다 읽으면 마치 51명의 지인이 생긴듯한 느낌이 든다. 만약 <피프티 피플>을 읽는다면, 당신에게도 51명의 지인이 생길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책.




 가족은 없었다. 가족 비슷하게 있었던 건 거의 스무 해 전쯤, 잠시 동거하던 여자가 있긴 했으나 그야말로 잠시였다. 좋은 여자였다. 막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계범의 반밖에 없는 오른발을 주물러 주던 좋은 여자였다. 계범은 태어날 때부터 오른쪽 발가락이 두 개밖에 없었다. 엄지와 두 번째 발가락이 있고, 나머지는 비스듬하게 없어 발은 뾰족한 지느러미 같았다. 작업화를 신으면 티가 나지 않았지만 딱딱한 작업화 안에서 하루 종일 균형을 못 잡았다. 양말 같은 걸로 신발 속을 채우긴 했어도 그렇게 피로할 수가 없었다.  341p​


숙소 바깥에는 폐지 수거함이 있었다. 주로 환자들이 다 읽고 버린 신문과 잡지가 많았다. 계범은 마음에 드는 읽을거리를 찾아들어 잠시간을 보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억지로 글을 읽게 한 게 다행이었다. 너는 발이 그러니 글씨를 꼭 읽어야 한다. 학교는 끝까지 못 마쳐도 글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서 책상머리에 눌러 앉혔다. 341p​


어느 날 계범은 폐지더미에서 동화책을 발견했다. 최근에 죽은 아이를 날랐던 적이 있었던가, 잠깐 기억을 더듬었다. 없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죽는 것에도 익숙해진지 꽤 되었지만 기왕이면 퇴원하는 아이가 버리고 간 것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방으로 돌아와 찬찬히 읽어보니 도마뱀이 주인공이었다. 사고로 발가락을 잃은. 애꾸가 된 생쥐에게 위로를 하며 발가락을 보여주려고 도마뱀은 정강이까지 오는 부츠를 벗었다. 옷을 웬만한 사람보다 번듯하게 입는 도마뱀이었다. 계범은 남색 작업복을 벗어난 게 언제였던가 기억을 더듬었다. 숙직실의 간이 행거 위엔 걸린 옷이 별로 없었다. 도마뱀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근사한 모자를 쓰고, 식물채집 가방을 들고, 눈이 오면 나무로 엮은 신을 신고 친구들을 만나러 다녔다. 345p​


다음 주 수요일엔 모자를 사야겠군, 계범은 마음먹었다. 34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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