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을까. 우리 사이에 투명한 유리 벽이 세워진 것은. 이제는 입을 열기 전, 머릿속에서 수십 개의 문장이 부서져 내린다. 이 말의 온도는 적절한가. 이 침묵의 결은 틀리지 않았는가. ‘눈치’라는 이름의 보이지 않는 신호등이 뇌 속에서 쉴 새 없이 점멸한다. 적색. 호흡을 멈출 것. 황색. 조심해서 발언할 것. 녹색 신호는 존재하지 않는 불빛처럼 좀처럼 켜지지 않는다. 결국 가장 무해하고, 가장 다정한 단어만을 골라 건넨다. 얇게 얼어붙은 강 위를 발끝으로 딛듯, 관계라는 위태로운 결정이 부서질까 전전긍긍하며.
이러한 상실은 비단 언어에만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수많은 감각을 잃어버린 채 살아간다. 충동적으로 몸을 싣던 새벽 기차의 낭만, 이유 없이 밤새워 나누던 통화 너머의 뜨거운 숨결, 서툰 글씨로 눌러 담았던 진심의 무게 같은 것들. 실패마저 숫자로 환원되는 시대의 공기 속에서 모든 것은 희미해져 간다. 상처받을 용기가 휘발된 자리에 우리는 자신을 위한 안전한 섬에 닻을 내린다.
때로는 꿈을 꾼다. 텅 빈 도시의 지하, 오래된 재즈 LP가 우는 바에 홀로 앉아 있는 꿈. 바텐더는 아무런 질문 없이, 투명한 잔에 얼음을 부딪치며 위스키를 따라준다. 그곳의 공기는 모든 언어를 용서할 것만 같다. 갈 곳 없는 푸념, 세상의 논리를 비껴간 독백, 심지어 침묵의 형태마저도 편안하게 받아들여질 것 같은, 기묘한 안도감. 마치 세상의 끝에 존재하는 중력이 다른 행성처럼.
그러나, 눈을 뜨면 여전히 이곳은 잿빛 현실이다. ‘좋아요’라는 숫자로 관계의 온도를 재고, 1이 사라진 대화창의 진공 상태에 심장이 서늘하게 죈다. 아랫집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에 익숙해진 지 오래. 한때는 존재했던 온기는 어디로 증발했을까. 어쩌면 우리는 ‘나’ 자신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타인의 시선이라는 거울에 비친 모습에 나를 끼워 맞추느라, 내 안에서 울리던 진짜 목소리를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정제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감정과 표현들이 그리워 마음 한편이 시리다.
오늘도 나는 수많은 말들을 소리 없이 삼킨다. 유리 벽에 갇힌 채, 창밖의 소란스러운 세상을 그저 눈으로 좇는다.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는 날이 올까. 언젠가 이 벽에 작은 금이라도 생겨, 다소 서툴러도 진심 어린 말 한마디가 희미한 빛처럼 새어 나갈 수 있을까. 정답 없는 질문을 품고, 상실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