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옷장 연대기

by 창운

내게 옷은 단순한 천 조각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주 먼 과거, 이제는 아련히 떠오르는 중학교 2학년 시절. 가족 외식 자리에서 마주친 친구는 다음 날 학교에서 내게 한 마디를 건넸다.


- 너 패션에 관심 없지?


그 말은 상처라기보다 오히려 뇌의 특정 회로를 건드린 작은 스파크에 가까웠다. 찰나의 자극은 사춘기의 마른 가지를 타고 불꽃처럼 번져 나갔다. 그날 이후, 옷장은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문이 되었다. 온라인 쇼핑몰 모델들을 따라 하며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한동안 패션 잡지를 구독했다. 나는 그렇게 패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3학년 무렵, 몇몇 친구들은 내 옷차림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소심한 관심이었지만, 내 안의 작은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스물셋, 아르바이트를 하며 두둑해진 지갑을 열어 중고등학생 시절 감히 넘볼 수 없었던 힙합 문화의 상징 같은 스트릿웨어를 품에 안았고, 빈티지 숍을 뒤져 클래식한 영국식 감성의 외투와 미국 대학생 같은 단정한 캐주얼 브랜드로 온몸을 감싸기도 했다. 유행이라는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절제된 실루엣과 미니멀한 감각을 좇았고, 이내 자유분방한 일본식 캐주얼로 넘어가 독특한 아이템들을 수집했다. 지나고 돌이켜보면 긴 여행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옷으로 자신을 정의하려는 듯, 매번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할 때마다 이전의 흔적들은 미련 없이 처분했다. 과거는 그렇게 깔끔하게 지워지는 듯했다.


자기관리에 실패하고 옷에 대한 열기가 식어버린 시간이 찾아왔다. 또 다른 스타일을 좇다가 기능성 의류에 머물렀던 옷장 속 열정은 갑작스레 불어난 몸무게와 함께 5년간의 긴 잠에 빠져들었다. 옷은 더 이상 나를 설레게 하지 못했다. 그저 몸을 가리는 수단에 불과했다. 그러나, 최근에 멈춰버렸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불어났던 살들이 제자리를 찾고, 잊고 지냈던 옷에 대한 떨림이 다시금 내 안에서 움트기 시작했다.


오랜 침묵을 깨고 마주한 옷장 안에는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늘 새로운 스타일로 갈아탈 때마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지난날의 유행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마지막으로 입었던 몇 벌의 옷만 남았을 거로 생각했지만, 그 안에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의 파편들이 잠들어 있었다.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힙합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 색이 바랜 한정판 운동화, 독특한 패턴이 박힌 재킷까지. 봉인되었던 과거의 흔적들이 일제히 나를 응시하는 듯했다.


예전 같았으면 미련 없이 처분했을 것들이다. 유행이라는 잔인한 기준 앞에서 그들은 설 자리를 잃었을 테니까. 나이가 들어 어느 정도 열정이 식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내가 추구하는 것이 견고하게 뿌리내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 낡은 옷들은 더 이상 처분의 대상이 아니었다. 옷장 한편에 존재하며 조용히 과거의 시간을 증언하고 있었다. 어쩌면 귀찮음이라는 현실적인 이유가 가장 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너머에 나는 분명히 다른 무언가를 느낀다.


낡은 옷들은 단순히 유행이 지난 의류가 아니다. 그것들은 내 삶의 지문이자, 시간이 흘려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잔해들이다. 옷장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미로처럼 얽힌 시간의 지도를 발견하게 된다. 사춘기 시절 서투른 설렘, 20대 초반의 과감한 도전, 그리고, 잠시 모든 것을 놓았던 침묵의 시간까지. 각기 다른 옷들은 특정한 시기의 나와 연결되어 있다. 옷을 입고 거리를 걷던 날의 공기, 친구들과 나누었던 시시콜콜한 대화, 모든 흔적이 옷의 주름 속에 밴 듯하다.


나는 이 옷들을 더 이상 유행이라는 잣대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저 나만의 방식으로 아무렇게나 입고 다닌다. 유행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라지지만, 옷장 속 시간의 지도는 영원히 나를 따라다닌다. 낡은 옷가지들을 보며 생각한다. 미래의 나는 어떤 옷을 입고 있을까. 이건 참 흥미로운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