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당장 죽을 수도 있다고 내게 말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이성의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
그날은 오랫동안 알고 지냈을 뿐인 지인 D씨를 통해 일을 소개받는 자리를 갖는 날이었다. 내게 일을 주려던 U 또한 몇 년 전 함께 일을 하던 사람이라 쉽게 일 얘기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독한 술과 함께하는 중화요리를 선호하는 내 취향에 맞춰 그럴듯한 중식점을 찾았다. D가 U에게 맥주를 권했다.
'이 형은 맥주만 마셔. 형. 한잔해.'
'안돼. 오늘 재활용 쓰레기 버리기로 마누라랑 약속했어. 분리수거 안 해놓으면 나 집사람한테 뒤진다.'
U가 거절했다.
'맥주 한잔 마신다고 분리수거를 못하는 건가?' 하는 궁금증이 들었는데 D가 먼저 그 부분을 집요하게 추궁하며 U에게 술을 권했고, 나도 추임새를 넣어가며 거들었다. 결국 U는 술을 마셨다. 그게 시작이었다.
D는 나보다 10살이 많다. U는 나보다 15살이 많았다. 나이 따위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 나는 '형' 또는 '형님'이라는 호칭만 쓸 뿐 별로 손윗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특별한 사람이 아닌 이상 30세가 넘어가면 대부분 거기서 거기다.
U는 연거푸 맥주를 들이켰다. 혼자서 네댓 병 이상을 금세 비우고는 흥에 겨웠는지 노래방에 가자고 했다. 노래를 부르고 싶은 게 아니라 도우미를 부르고 싶은 거겠지... 나이를 먹은 탓인지 술을 마시면 노래가 마음처럼 불러지지 않는다. 예전엔 술김에 더 잘 부를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젠 공복일 때 목소리가 가장 잘 나온다. 어쨌든 노래방은 뭔 노래방이냐며 근처 호프로 방향을 틀었다. 10시쯤 적당히 자리를 파하고 U는 대리기사를 불러 보내고, 나는 택시를 잡아 집으로 돌아왔다.
택시에서 내려 공동현관에 도착했을 때, U의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그리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처음 들어보는 여성의 것이었다. 말투만으로 알 수 있다. 사적으로는 절대로 말을 나누지 않을 타입의 여성이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스콜로 터져버린 논둑에서 콸콸 쏟아져 나오는 흙탕물처럼, 수많은 말을 쉼 없이 쏟아내었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서 U는 노래방에서 도우미와 함께 놀고 돌아온 상태였다. 관념은 무섭다고도 답답한 것이다. 확실한 증거조차도 굳어져버린 관념 앞에서는 진실을 감추기 위한 도구로 치부되어버린다. 그런 이에게는 사실을 말해도 소용없다. 마치 치졸한 변명을 하는 비겁한 모습을 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형수님. 믿고 믿지 않고는 형수님이 판단하실 문제고, 저는 사실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노래방을 가지 않았고 U형님이 분리수거를 이유로 술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술은 먹였습니다. 술을 먹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줄 알았다면 아마 술도 권하지 않았을 겁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은 이런 마음이다.
'어이. 변명하기 싫으니까 알아서 잘 들었으면 좋겠다. 일단 나는 거짓말을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날 변명하는 사람 치부하지 마. U가 한두 살도 아니고 이제 50이 다 돼가는 성인인데, 내가 술 먹으라 말라한다고 그게 선택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 우스운 거야.'
앞으로 안 볼 사이도 아니기 때문에 마음을 잘 순화시켜서 말했지만, 추후 선을 넘는다면 그때는 안 볼 사이가 될 테니 제대로 얘기하겠지.
그녀는 사막에서 불어오는 메마른 바람에 섞인 모래 알갱이처럼 많은 말을 쉼 없이 해댔다. 그녀가 말하는 모습을 보며 쇼팽의 녹턴을 듣는다면, 맹렬한 바람이 부는 간척지에서 듣는 것만큼이나 멋질 것 같고 생각했다. 녹턴은 격정적인 풍경과 함께라는 개인적인 기준과 미학이 있다. 이혼하려고 짐을 쌌다,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죽으려 했다, 아이들이 있어서 그러지 못하고 있다, U가 한 번도 돈을 집에 가져다준 적이 없다, 나도 밖에서 잘 나가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남자를 만날 수 있다는 둥. '처음 통화하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이라고 생각될 만한 내용이 가득했다.
감정을 무분별하게 발산하는 행위는 질병의 연부를 떠나 스스로를 지금의 현실에 가둬버리는 아이언 메이든과 같다. 발산하면 할수록 상처를 입고 내용물이 전부 빠져나와, 종국에는 껍데기만이 남는다.
한 시간에 가까운 긴 통화 끝에 그녀는 약간의 안정을 되찾은 듯 차분한 목소리로 감사의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바꿀 수 없는 것은 바꾸지 않고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지만, 반드시 바꿔야 하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더라도 바꿔야 한다. 그 정도의 신념이 없으면 그녀와 같이 주변에 휘둘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