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노를 실천하며 차박여행을 하기에 우리는 노노노부부 우리의 이야기는 노노노차박이야기입니다.
10년쯤 전의 일이다. 남편은 퇴사한 후 프랜차이즈 음식점을 했다. 3년가량 운영하다 문을 닫고 불량주부로 집에서 살림을 맡게 되었다. 부부가 함께 운영해야 하는데 직원을 쓰니 비용이 많이 들고 효율적이 아니었다. 서로 고생을 해야만 했고 개업 후로 6개월 정도 잘 되었지만 수입도 그럭저럭 많지는 않았다. 남편가 주부로 생활하자 편하고 안정적으로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지내던 중
딸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 독일로 연수를 갔고 아들도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시간이 많아진 남편은 고용복지센터도 상담도 하고 폴리텍대학에서 목공연수도 하는 등 직업 찾기에 진심이었다.
50이 넘은 나이에 특별한 기술이 없는 사람에게 폼나고 쉬운 일자리를 얻는 것은 쉽지 않았다.
어느 날
고용복지센터에서
주차관리원을 하겠냐는 제안이 와서 취직을 하게 되었다. 충분한 보수는 아니지만 생활이 조금 윤택해졌다.
그 후 남편이 나와 드라이브를 하자는 제안을 자주 해왔다.
어느 토묘일 저녁 광안리 바다 보러 가자고 했다. 남편처럼 부산에서 자란 사람들은 해운대보다 광안리를 더 선호한다. 서민들의 아기자기한 추억들이 서려있는 곳인가 보다.
모래밭에 앉아서 파도를 보았고 갈매기의 끼룩 소리를 들었다. 그때는 광안대교가 없어 지금보다는 바다가 넓었다. 일주일 내내 좁은 공간에 갇혀 있다가 바다를 보니 기분이 좋았다. 자판기 커피 한잔 마시며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기분이 풀려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남편이 좁은 길로 들어갔다.
'길을 잃어버렸나?'
'남편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좁은 골목길을 제법 달렸다.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어느 젊은 남자분이 마중을 나왔다.
'이게 무슨 일이야.!'
번쩍거리는 차들이 진열되어 있고 깨끗한 사무실이 있었다. 차를 살 마음도 없고 관심도 없는 나에게 설명이 쏟아졌다. 급기야 어떤 차에 시승도 하게 되었다.
포드 자동차에서 나오는 소형차인데 지금은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다. 외제차인데도 이끄러 지는 듯한 승차감도 없었고 내부도 고급스럽지는 않았다.
남편과 자동차 딜러는
'브라브라~~~~'
남편의 표정은 기대에 차있고
나는 무조건 반대
그다음은 폭스바겐의 골프, BMW의 미니 등 작은 외제차 판매점의 소형차를 보는 일이 잦아졌다.
내 월급만으로 빠듯하게 살아가다가 남편의 월급이 나온 첫 달은 부자가 된 것 같았다. 그러나 모아둔 돈 없이 거의 전액 할부로 차를 구입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남편은 포기하지 않고 시간만 나면 자동치차대리점으로 나를 인도했다.
딸이 서울서 대학교를 다니나 독일에서 지내나 비용은 비슷하게 들었다.휴학하고 복학하고 대학교를 다니는 기간이 무려 7년이었다. 그 나이에 경험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보지 못한 것을 해보라고 넓은 세상으로 보내주었고 혼자 외국에서 즐겁게 생활하는 것만으로 대견했다. 그러나 부모인 우리는 경제적으로 빠듯했었다.집대출금도 있고 고등학생 아들도 있었다.
그때 타던 차는 8년을 탔으나 왕복 20km쯤 되는 거리를 출퇴근할 때만 사용했으니 겉과 속이 다 멀쩡했다.
"안돼, 딸 졸업할 태까지만 참자."
1년......
또 1년.......
남편은 끈질겼다. 딸이 7년 만에 졸업을 했고 취직을 하여 독립하였다.
"왜 외제차를 사야만 해요?
현대. 기아차는 절대 타지 않으려는 남편의개똥철학이 있었다.
크고 번듯한 외제차를 살 형편이 안되어 소형 외제차를 살려고 했나 보다. 외제차는 포기하니 남은 선택지는 쉐보레 밖에 없었다.
내 생각이 바뀌기 전에 남편은 서둘러 쉐보레 대리점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최종 결정된 차는 트렉스와 올란도가 있었는데 우리 가족이 타기에 트렉스가 작아 보여 올란도로 결정하였다. 풀옵션이었다. 딸이 취직을 해서 별 걱정 없이 할부로. 샀다.
그리고 차박이 시작되었다. 살 때는 고민했지만 타고 다니니 좋았다. 조심조심 운전했고 10년이 지나도록 긁힘 하나 없이 탔다.
남편이 취직한 지 3년쯤
주차원들을 하인처럼 막 대하는 고객과 다툼이 벌어졌다.
남편은 주차 후 취하는 외국인과 우리나라 사람의 태도 차이를 이야기하곤 했는데 외국인들은 항상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간다고 했다. 이 건물에 입주한 젊은 여자분은 주차원들을 머슴 대하듯 한다고 했다. 한 번씩 주차하는 분들 중에도 그런 분이 더러 있다고 했다. 모멸감을 느끼는 일들이 자주 있었고 다혈질인 남편이 참지 못하고 그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또다시 전업주부로 돌아왔다. 올란도 할부금은 다 갚지 못했다. 그때 수입은 아들과 우리가 생활하기에는 지장이 없었다.
' 올란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카페와 '차박여행'이라는 밴드를 이용하면서 차박을 시작하였다. 의자를 젖히면 우리가 누울 공간은 충분히 나왔다.
명절날 시골 다녀오다가 길이 너무 밀려 1박을 했다. 생각보다 편하게 누웠다.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는 너무 추웠다.
그래서 구스다운 침낭을 샀다.
침낭을 산 김에 본격적인 차박에 들어섰다.
해발 850m 신선한 공기와 모산재 쪽에서 보는 일출, 100m 올라가면 보는 별, 파란 억새들
신세계였다. 그때 캠핑의 맛을 알았다.
그해는 황매산만 10번을 더 갔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주일동안 열심히 근무하고 금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밤까지 차박과 등산을 즐기는 패턴으로 자리 잡았다.
남편이 집안살림을 하기에 금요일 4시 40분 학교 앞에서 만나 일요일 밤까지 자연을 즐기고 돌아오는 우리의 차박여행은 그렇게 이어져 갔다.
그때 남편의 차를 사고 싶은 마음과 끈질긴 기다림
올란도란 차의 선택이 우리를 차박으로 이끌었다.
우리의 차박의 시작은 올란도 구입이었다.
지금 와서 남편이 말했다. 그 일을 계속했다면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지하 주차장에서 맡았던 그 매캐한 공기 속에 있어 봤기에 이 깨끗한 공기의 고마움을 더 잘 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