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딸이 팥을 안먹는 것을 몰랐다.

제주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by 성희

​꿈결 같던 제주에서의 닷새가 섬의 변덕스러운 날씨에 발이 묶였다. 십 분마다 표정을 바꾸는 제주의 하늘은 끝내 기상이변이라는 마침표를 찍으며 비행기를 붙들었다. 붐비는 제주공항의 소란을 지나, 밤늦게 도착한 김해공항의 공기는 서슬 퍼렇게 싸늘했다. 세 번의 환승과 이십 분의 찬 길을 걸어 돌아온 집, 나를 반기는 것은 낭만 없는 현실의 빨래더미였다.

​여독이 몸의 구석구석을 저미던 다음 날 아침, 잠을 깨운 것은 딸아이의 서운한 타박이었다. 텅 빈 냉장고 앞에서 "엄마, 안 일어나요?"라고 묻던 아이는, 내가 안도의 마음으로 꺼내놓은 팥호빵을 보며 아빠보다 내 식성을 모른다며 날을 세웠다. 비타민을 먹더라도 위장을 보호해야 한다는 아이의 바른말이 그토록 차갑게 들린 것은, 아마 내 몸이 너무 고단했기 때문이었으리라.

​부스스한 머리로 집 앞 마트로 달려가 식빵 한 줄과 양배추를 사 왔다. 찬 바람에 정신을 깨우며 정성껏 아침 상을 차려냈지만, 식탁 위에는 설익은 화가 안개처럼 일렁였다. 말없이 접시를 비우고 나가는 딸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한동안 비어버린 거실에 서 있어야 했다.

​오후가 되어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카카오페이 십만 원이라는 숫자. 그것은 말로 다 하지 못한 아이의 서툰 사과이자, 고생한 엄마에게 건네는 미안함의 무게였다. 나는 가만히 휴대폰을 들어 문자를 적어 내려갔다.

​"딸아, 요즘 나는 우리 집을 예쁘게 리모델링하는 상상을 한단다. 우리가 40년간 고치지 않던 집이지만 이제 너의 신혼집으로 꾸며 주려하니 많이 리모텔링 해주고 싶구나. 낡은 곳은 고치고 따뜻한 온기로 채워가는 그런 꿈 말이야. 그 집의 중심에는 언제나 네가 있단다. 시험 앞둔 동생이 챙기느라 동생에게 조금 더 기울어 있을지도 모르겠네.

정작 우리 딸 식성 하나 살피지 못한 부족한 엄마지만, 너를 향한 내 사랑은 한 번도 낡은 적이 없단다."


​사랑한다는 말로 맺은 문자를 보내며 깨달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낡은 벽지를 뜯어내는 일뿐만 아니라, 서운함으로 얼룩진 마음의 벽을 사랑으로 다시 도배하는 '리모델링'이었다는 것을.

​제주의 변덕스러웠던 비바람도, 아침의 시렸던 공기도 이제는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호빵의 김처럼 하얗게 흩어진다. 십만 원이라는 숫자보다 더 묵직하게 다가온 딸의 진심 위로, 우리 집 마음의 온도가 일 도쯤 더 따스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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