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냉장고가 딸의 식성 맞추기

전업주부는 전문직이다.

by 성희


​모레면 일본 여행을 떠난다. 집을 비우는 동안 남겨질 가족들의 끼니가 걱정되어, 아들이 좋아하는 돼지국밥을 넉넉히 주문했다. 베란다에 싱싱한 부추가 있으니 엄마가 없는 동안 챙겨 먹으라 당부했다. 아들은 대환영이다.
​사실 아들은 지금 인생에서 가장 치열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 시험을 두 달 앞두고 아침은 집에서 먹고, 점심과 저녁 도시락 두 개를 싸 들고 도서관으로 향한다. 온종일 밖에서 공부하다 밤늦게야 귀가하는 아들의 하루는 내가 싸준 두 개의 도시락 통에 의지해 흘러간다. 그 고단함을 알기에 집에서 먹는 아침이나마 좋아하는 국밥으로 든든히 먹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예상보다 일찍 귀가한 딸은 국밥을 거절했다. 인스턴트 돼지국밥은 좋아하지 않는단다. 어제는 팥을 안 먹는다는 걸, 오늘은 국밥 취향을 새로 배웠다. 나의 신경이 온통 도서관에서 고군분투하는 아들에게만 쏠려 있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사실 열아홉 살에 대학을 다니러 서울로 올라간 딸과는 아주 긴 세월을 따로 살았다. 서른넷에 부산 집으로 돌아와 2~3년 함께 지냈지만, 곧 우리가 고흥으로 귀촌하는 바람에 또다시 떨어져 지내야 했다. 딸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다시 한집에 살게 된 지금, 나는 딸의 식성을 다시 처음부터 공부하는 중이다. 조기퇴직 후 살림을 도맡았던 남편에게 바통을 이어받아 전업주부가 된 지 이제 겨우 5개월. '초보' 딱지를 갓 뗀 나에게 딸의 까다로운 식성은 아직 풀지 못한 숙제와 같다. 딸은 먹고 싶은 게 있냐는 물음에도 특별한 요구가 없다. 그저 엄마가 알아서 내 입맛을 맞춰주길 바라는 무언의 기대뿐이다.
​그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나의 '계획경제'는 새벽부터 가동된다. 나는 장을 볼 때 시장보다는 쿠팡을 애용한다. 필요한 만큼만 소량 주문할 수 있고, 새벽 배송 덕분에 식재료의 신선함을 고스란히 식탁으로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식비를 아끼고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려는 나만의 철저한 경영 방식이기도 하다.
​딸의 다이어트와 건강을 위해 이번에는 닭가슴살도 주문했다. 양배추와 양파 패티에 식빵을 곁들이던 아침에서, 딸을 위해 식빵을 빼고 두부를 넣은 건강식으로 식단을 바꿨다. 아들의 아침 식사를 차려내며 동시에 점심과 저녁 도시락 두 개를 싸고, 딸을 위한 샐러드 식단까지 준비하다 보면 아침 시간은 눈코 뜰 새 없이 지나간다.
​오늘 저녁, 갑자기 딸의 저녁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 닥쳤다. 딸의 입맛에 맞는 메뉴가 없어 고민하던 찰나, 딸은 "내가 알아서 먹을게"라며 방으로 들어간다. 미안함이 밀려오지만 이내 "그래, 알아서 해"라며 서운한 마음조차 가만히 내려놓는다.
​서로 다른 상황과 입맛을 세밀하게 조율하는 일. 전업주부야말로 데이터와 체력, 그리고 가족에 대한 깊은 관찰력이 필요한 전문직임을 다시금 절감한다. 비록 5개월 차 신입 주부의 식탁이 완벽할 순 없겠지만, 각자의 허기를 달래는 따뜻한 안식처가 되길 바라며 나는 오늘도 새벽 배송 알림과 함께 내일의 식단을 구상한다.

작가의 이전글아직 딸이 팥을 안먹는 것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