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의 손이 만나는
모든 순간이 대성당이에요.

레이먼드 카버와 로댕의 '대성당'(Cathedral)

by 온돌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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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귀스트 로댕은 이 작품에서 한 사람의 마주 잡은 두 손이 아니라 서로에게 건넨 두 사람의 오른손을 형상화하고 있다.

당신과 나의 손이 만나는 순간.

그 순간은 서로를 동경하던 두 연인이 처음 손을 잡고 섬광 같이 감정이 고양되는 순간이기도 하고, 참회하는 영혼이 용서하는 마음을 만나 해묵은 원한이 새벽 어둑서니처럼 지워지는 순간이기도 하며, 세상 풍파에 자신을 놓아 버린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은혜의 순간이기도 할 것이다.

로댕은 자신이 그려 낸 이 순간을 '대성당'(Cathedral)이라고 명명했다.

수백 년에 걸쳐 장엄하게 축조한 건축물이 아니라,

내가 건넨 손을 당신이 맞잡는 순간, 당신이 내민 손을 나의 손으로 감싸는 모든 순간,

당신과 내가 있는 이 자리가 바로 대성당이라는 생각은

로댕의 극진한 사유가 만년에 다다랐던 종교적이고도 인간적인 깨달음이리라.


나는 연인이나 옆지기(배우자)와의 불화로 힘들어하는 벗이나 후배가 있으면, 로댕의 '대성당'을 작은 액자로 만들어 선물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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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로댕의 '대성당'을 보고 나서, 비로소 레이먼드 카버의 아름다운 소설 '대성당'이 로댕의 작품에서 착안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단편 '대성당'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어느 날 아내의 친구가 '나'의 집에 방문한다. 그의 이름은 '로버트', 낙천적인 노인으로 시각 장애를 지녀 앞을 보지 못하며 얼마 전 상처하여 홀로된 인물이다. '나'는 낯선 사람의 방문이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함께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격의 없는 로버트의 태도에 점차 마음이 풀린다. 피곤한 아내가 먼저 곯아떨어지자 로버트와 단 둘이 남은 '나'는 어색한 기분에 TV를 켠다. TV 화면에는 유럽 각지의 대성당이 소개되고 있었다. TV 화면에 등장하는 대성당에 관해 앞을 보지 못하는 로버트와 공소한 대화를 나누던 중 '나'는 문득 로버트가 대성당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최선을 다해 대성당의 모습을 묘사하려 하지만 '나'는 미학적 표현에 서툰 사람이었다. 그때 로버트가 제안을 한다.


'내 손을 자네의 손 위에 얹을 테니 자네는 연필을 쥐고 대성당을 그려 보게나.'


서툴지만 정성을 다해 대성당을 그려 나가는 동안 '나'의 손을 따라 로버트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고,

그 순간 두 사람의 영혼은 더 이상 '나'의 집 안에 머물러 있지 않다.


"어때?" 그가 말했다. "보고 있나?"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우리집 안에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나는 말했다.


마음을 열고, '나'의 손과 로버트의 손이 만나는 그 순간, 두 사람이 있는 곳이 대성당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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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지금 여기가 맨 앞"(이문재, 문학동네, 2014)에 실린 '오래된 기도'라는 시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중략)
기도하는 것이다.


이문재 시인의 말처럼 '두 손을 모으기만 해도 기도'이다.

로댕과 레이먼드 카버의 생각처럼 '당신과 나의 손이 만나는 곳이 바로 대성당'이다.


오래전 벗 하나가 농담으로 한 말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손이 뭔지 알아? 바로 빈손이야."

빈손, 홀로 있는 손은 그 사람의 고독한 실존을 무겁게 드러내지만

한 사람의 두 손이 모이면 온 마음을 모은 간곡한 기도가 되고,

당신과 나의 손이 만나면 우리 있는 이 자리가 경건한 대성당이 된다.

이것은 '손의 신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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