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아까시나무, 구멍가게의 통통배 빵
어렸을 때 소원 중 하나는 '우리 집에 손님이 오는 것'이었다.
오랜 벗들과 술 마시며 시시한 이야기를 나눌 때 이따금 이 말을 해 보지만
손님 오는 게 어째서 어린애 소원이 될 수 있는 건지 대체로 이해 못하는 눈치였다.
나의 부모는 딱 자신이 가진 재산과 사회적 지위만큼만 교분을 맺겠다는듯이
친구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일가 사람들과도 소원했다.
친구가 없는 대신 꺼리는 사람은 많아 애초에 손님 오기를 바라는 것은
폐지된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일과 같았다.
남편을 외국인 노동자로 중동에 보낸 어머니는,
당신도 돈을 벌기 위해 쉴 새 없이 허드렛일을 해야 했으므로
두 어린 자식을 먹이고 입히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녹아내렸다.
그러니 '엄마 손 잡고' 어딜 놀러가는 일은 어린애 생각으로도 언감생심이었다.
그런 나에게도 어머니와 함께한, 작은 불빛 같은 소풍의 기억이 있으니
그때는 5월의 봄날이었고, 일요일이었을 거다.
국민학교 5학년 때였다.
그날 어머니는 이른 아침부터 빨래골(북한산 자락에 있는 계곡)로 소풍을 가자고 했다.
전에 없던 일이라 좀 바보스럽게도 "왜요?"라고 엄마에게 물었다.
"너도 알지. 먼 친척인 아모레 이모. 그 이모가 오늘 온다는데 난 그 이모가 싫어."
그러니까 손님이 오기로 했는데 그 손님이 싫어 잠시 피난가듯 다른 데 가 있겠다는 심산이었다.
이모는 엄마와 촌수가 먼 일가 분이었고, 아모레 화장품을 팔아 '아모레 이모'였다.
이유야 무엇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랴.
어린이대공원이 별거냐 자연농원(지금의 에버랜드)이 대수랴. 엄마하고 같이 소풍을 가다니 그것만으로 신이 났다.
빨래골 가는 길에 구멍가게에 들러 통통배랑 우유도 하나씩 샀다. 통통배는 타원형 모양의 빵으로 내가 좋아하는 주전부리였다.
일요일 오전의 공기는 고요하고 다정했다.
볕은 온화하고 길가에 선 아까시나무에는 주렁주렁 꽃이 매달려 우거진 이파리 안에서 나무가 무어라 말하는 것처럼 붕붕, 벌이 날개짓하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와 나는 아까시나무 잎을 따서 가위바위보 놀이를 하며 걸었다. 당시엔 아까시나무 잎으로 가위바위보 놀이를 많이 했다. 아까시나무는 길게 난 잎자루에 작은 잎이 여남은 개씩 달려 있는데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길 때마다 작은 잎을 하나씩 따고, 먼저 잎을 다 떼어내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엄마와 나는 연신 힘차게 오른팔을 접었다 펴면서 '가위바위보'를 외쳤고, 지든 이기든 웃음보가 깔깔 터졌다. 놀이는 빨래골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됐다.
계곡에서 무얼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아무것도 안 했던 것 같다. 애초에 소풍이 목적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점심 끼때가 되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계곡에서 엄마와 함께 있으면서 느꼈던 즐겁고 행복한 기분은 감실에 숨겨 둔 귀한 보물처럼 지금도 내 마음속에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다. 엄마와 함께 있으니 삽상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그늘도 재밌는 놀이였고, 돌돌돌 흐르는 시냇물 소리도 유쾌한 농담이었으며 가만가만 지나가는 남생이도 어여쁜 친구였다.
영화 '승부'에서 조훈현 국수는 제자인 이창호 사범에게 이렇게 조언을 한다.
'평정심을 잃으면 바둑은 거기서 끝이다. 익숙하고 편안한 것들을 떠올려 봐. 생각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것들.'
40년도 더 지난, 오래 전 그때 엄마와 봄 산책을 했던 추억이 내게 그러하다.
삶이 위기일 때, 타인의 적의와 냉대와 부딪힐 때
눈을 감고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대기의 밀도를 높이던 아까시꽃의 짙은 향기,
나무들의 밀어처럼 웅웅거리던 벌떼 소리,
아까시나무 이파리를 한 손에 든 엄마와 아이의 맑고 높은 웃음소리,
엄마와 반씩 나누어 먹은 통통배의 고소하고 달콤한 맛.
마음의 감실에서 그날의 기억을 꺼내 가만히 바라보면
평정심을 잃어 느껴지지 않던 주위 사람의 선의와 애정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