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의 예감을 안고 읽어 나가야 하는 책들
텍스트 힙: 글자(Text)와 힙하다(Hip)를 결합한 신조어로, 독서와 텍스트를 즐기고 인증하는 행위를 멋지게 여기는 2030 세대의 최신 트렌드.
이런 신조어가 유행한다는 사실을 최근 팟캐스트 방송을 듣다가 알았다. 아이들과 함께 모국어를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인 내겐 어쨌든 청년들이 읽는 데 취미를 들이기 시작했다니 안 읽는 것보다야 백배, 천배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어딘가 불편하고 찐덥지 않은 마음이 든다. 독서 문화로서 '텍스트 힙'이라는 말 안에는 과시 내지 자기 현시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자기 현시의 수단으로서 '책'이라니. 그 말을 처음 듣는 순간 머릿속에 연상된 이미지는 수십억 대의 집을 여러 채 가진 정치인이 반나절 쿠팡 물류 센터에서 까대기 노동을 하는 모습이었다. 노동은 고귀하나 누군가의 자기 현시 수단으로 격하될 때 노동을 수단화한 그 사람은 비루해지고 노동은 모욕당한다.
노동이 자신도 살리면서 자신과 연결된 타자 또한 먹여 살리는 고귀한 행위인 것과 마찬가지로, 독서는 읽는 이를 일깨워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게 함과 동시에 타자에 대한 상상력을 길러 줌으로써 '나'를 '세상'과 연결해 '더 큰 나'로 살아가게 만든다.
인간은 아집에서 자유롭지 못해 '나'만 주장하면 너절한 삶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나'를 허물고 더 큰 나로 성장하여 품위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선 타자와의 소중한 유대가 필요한데 아집 덩어리인 인간이 아집에서 벗어나 기꺼이 '나'를 허무는 순간은 세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연애, 육아 그리고 독서이다.
이제껏 모노톤의 옷만 고집하던 남자는 평소 원색의 옷을 입을 거면 차라리 죽고 말겠다는 과장된 생각을 하다가도 사랑하는 여성이 선연한 노란 셔츠에 초록의 바지를 입으라 하면 기꺼이 착장해 준다.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사람들 중 먼지 같은 한 사람일 뿐이지만 나를 온 세상인 것처럼 바라봐 주는 아가의 모습을 보면 아가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 열 개라도 바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와 스승, 훌륭한 선배가 어떤 조언을 해 주어도 나 잘난 맛에 콧똥만 뀌다가 어떤 책을 읽으면서 문득 스스로가 부끄러워지고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게 되는 경우도, 흔한 일은 아니지만 또한 드물지도 않다.
그러므로 독서는 근원적으로 연애나 육아와 그 성격이 같다. 자기에게 매몰된 유아적 정신 세계에서 벗어나 타자와의 유대와 교유 속에서 어른이 되어 가는 행위인 것이다.
그렇다면 텍스트 힙은 어떤 성격의 독서 행위인가.
'책 읽는 장원영'과 상징적 동일시 내지 상상적 동일시를 하기 위해 책을 들고 있다면.
책을 매개로 만나게 될 인간과 삶,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는 나의 모습을 사랑해서 책을 들고 있다면.
유쾌한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이들과 함께 모국어를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인 내겐 그렇게라도 책을 읽는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재작년 그러니까 2024년 10월의 어느날이었다. 교과서 집필자들의 저녁 식사 모임이 있었다. 대표 집필자로서 교사 집핍자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던 교수님께서 정년 퇴임을 하셨기에 이를 기념하고 감사의 마음을 전해 드리기 위한 자리였다.
교수님은 한국 근현대소설 연구자로서도 일가를 이루신 분이지만 빼어난 비평가이시기도 하여, 모임이 있던 그날에도 김윤식 학술상 선정 위원으로서 시상식에 참석하고 오시느라 늦게 자리에 함께하셨더랬다. 그리고 송구스럽게도 그날 주된 화제는 노교수님의 은퇴가 아니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었다. 워낙 놀라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한국 문단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온 것은 기쁘고 자랑스러운 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국문학 전공자인 교수와 현직 교사 들이 모여 있던 그 자리에서 한강에 대한 이야기는 꽤나 조심스러웠다. 그날의 주인공이었던 교수님조차 말을 아끼는 기색이 역력했다. 신중하게 한마디씩 꺼낸 말들은 조금씩 달랐지만 그 말들을 관류하는 공통된 의견은 '좀 놀랍다.'였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에 환호하기보다 오히려 탁월한 장편을 발표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김금희 작가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좀 더 많았던 것 같기도 하다. 당시 김금희 작가는 "대온실 수리보고서"(창비, 2024)라는 훌륭한 장편을 발표하여 독자들에게 알려지고 슬슬 책이 팔리기 시작했는데,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 이후 한강의 여러 책이 바로 베스트셀러 상위 10위 이내를 독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강이 훌륭한 작가이긴 하지만 노벨상 수상은 좀 뜻밖이더군."
교수님이 그날의 화제에 대해 꺼내신 딱 한마디 논평이었다.
그 의중이 헤아려졌다. 나 또한 한강에 대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한강에 대한 어떤 언급도 좀 조심스럽게 되었다. 왜냐? 노벨문학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문학'과 '상'이라는 두 단어는 서로 어울릴 수 없는 형용 모순의 말이지만, 어떤 작가나 어느 작품이 '권위 있는' 상을 받게 되면 사람으로 치면 이재용처럼 되어 버린다. 중늙은이인 나 같은 사람이 편의점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에우면 좀 안쓰러워 보이지만, 같이 늙어 가는 이재용이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온갖 재래언론에서 대서특필해 준다. 문학 세계에서 상이란 대체로 그러하다.
세계문학에서 한국문학이 갖는 의미와 가치는 대단하다. 한국처럼 시집과 문예지가 꾸준히 발간되고 팔리는 나라는 매우 드물다. "토지", "태백산맥" 같은 대하장편이 지속적으로 창작되고 높이 평가되며 널리 읽히는 나라는 이젠 한국밖에 없다. 민족사적 특수성뿐만 아니라 세계사적 보편성까지 획득한 빼어난 여성 작가가 이처럼 많은 나라도 한국 말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한 점에서 노벨 문학상은 진즉 박경리 선생님 같은 분에게 주어졌어야 마땅하다. 박경리 선생님이 받지 못한 노벨문학상이 한국의 다른 작가에게 주어진다면, 우선은 질문이 던져질 것이고 설명하는 데 적이 시간이 걸릴 것이다. 박경리 선생님이 아니라면 박완서 선생님 그리고 권여선, 신경숙, 공선옥 같은 작가들이 또 얼마나 훌륭한가.
박경리 선생님의 소설은 한국의 민족사와 사회상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보편적인 '비극미'를 완성하여 그로써 문학의 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시학"에서 말한 비극의 정수가 희랍 비극보다 더 완정한 형태로 박경리의 소설에 담겨 있으니, 그의 "토지" 1부와 "김약국의 딸들"은 읽다 보면 그 어마어마한 비극성에 몸이 다 떨릴 지경이다. 권여선은 어떠한가. 그는 '명정감(酩酊感)의 세계'라고 이름 붙일 만한 그만의 독자적 세계를 한국문학사 안에 창조해 놓았다. 신경숙은 '처연함의 세계'로 일가를 이루어 한국 현대 문학의 한 장을 이룩했으며, 공선옥은 '모성과 살림의 세계'라고 일컬을 만한, 역시 그만의 문학 세계를 일구어 일가를 이루었다. 이러한 작가들의 고단한 분투가 있었기에 한국 문학의 세계가 확장되고 풍요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한강은?
한강은 "내 여자의 열매"와 "채식주의자"를 읽든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든 그 책에 담긴 '세계'보다 '한강'이라는 존재가, '한강'의 스타일이 먼저 전면에 나선다. 어떤 소재를, 어떤 서사 기법으로 다루든 '음, 이건 한강의 작품이군.'이라고 단박에 맞힐 수 있는 그만의 스타일, 스타일을 놓지 못하는 작가의 의식 세계.
자기 스타일을 강하게 주장하는(또는 자기 스타일을 놓는 법을 익힐 만큼 성숙지 않은) 소설가를 보면, 나는 자연스레 불온한 혐의를 두게 된다. 이러한 의심은 문학동네에서 해마다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젊은 작가 수상작품집" 속 작품들을 보면 더 강해진다.
사려 깊은 작가는 거대한 슬픔으로서 공동체의 비극을 다룰 때 슬픔에 대한 참된 배려와 애도의 자세를 잃지 않고자 몹시 힘든 길을 선택한다. 그 길에서 때로는 상처 입은 자들을 드러내지 않기도 하고, 창작자로서 자신의 스타일을 아주 버리고 '최소'의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미덕을 감동적으로 보여 준 예술가로 가장 최근에 만난 분은 영화 '너와 나'를 연출한 조현철 감독이다. '너와 나'는 4.16 참사를 다룬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