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멜버른은 이렇게 흐른다.
아침으로 오트밀 죽을 먹는다. 세상에서 가장 만들기 쉽고, 싸고, 건강한 아침이었다. 아침에는 입맛이 없어서 토스트라든지 시리얼 같은 걸 찾기 마련이다. 특히 이곳 사람들을 보면 토스트에 베지마이트를 발라 먹거나 흔해 빠진 시리얼+우유로 아침을 시작하는데 나는 그런 걸 먹을 바에 굶는 게 낫다고 본다. 배는 채울지언정 영양을 봤을 때 너무 허접하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밥과 국으로 아침을 먹는데 내가 밥+국의 아침에 질려버린 것은 겉으론 소소해 보인다고도 할 수 있는 그 식단이 실은 엄마와 여자들의 노동으로 바쳐지는, 소소한 듯 하지만 사실 대단히 귀찮은 일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엄마와 할머니와 이모들이 늘 하는 말은 남자들은 아침에 꼭 밥이랑 국물을 먹어야 된다든가, 국물 없인 밥을 못 먹는다든가 하는 것이었고 나는 그 밥+국의 집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밥국에 대한 집념이 얼마나 큰가 하면 호텔 같은 곳에서 아침 뷔페를 먹을 때 밥, 국, 김치, 김, 젓갈의 메뉴를 보고 나는 누가 이런 데까지 와서 저런 걸 찾나 싶지만 의외로 사람들은 많이 찾았다. 그럼에도 나는 아침은 꼭 먹자는 주의여서 오트밀 죽이란 걸 몇 번 만들어 보고는 이게 내 인생 아침이란 걸 알았다. 겨울엔 끓여서 따뜻하게 먹고, 여름엔 밤새 우유나 요구르트에 불려서 시원하게 먹는다. 각종 견과류를 넣을 수도 있고 과일을 넣을 수도 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응용은 두유나 요구르트에 오트, 치아 시드, 냉동 베리를 넣어 불려 먹는 것이다. 재료를 다 섞고 밤새 놔두기만 하면 바로 먹을 수 있다. 정 단맛이 고프면 꿀을 뿌려 먹는다. 하지만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매일 같이 먹으면 질릴 수밖에 없다. 그래도 먹는다. 특히 아침밥이란 아무리 잡기를 부려도 가장 맛없는 끼닐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먹는다. 목에 넘기기도 쉽고 소화도 잘되는 오트밀은 그래서 더 아침으로 적합했다. 먹기 싫어도 그냥 꾸역꾸역 넘기면 어느새 다 먹게 된다. 오트는 먹을수록 건강해진다는 건 명명백백히 증명이 됐기 때문에 먹고 나면 언제나 기분이 좋다. 또 곡물을 키울 때 물이 적게 드는 편이라고도 하니 오트밀을 먹어야 할 이유는 이렇게 많았다.
베지마이트 토스트를 들고 허겁지겁 차에 오르는 사라를 속으로 쯧쯧 거리며 8시 반에 우리는 에센든으로 출발한다. 사라가 사는 동네는 아주 신생의 도시라서 가는 길은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고 곳곳에 새로운 마을이 지어진다는 광고판들이 보였다. 차에 치어 죽은 캥거루도 가끔 보였다. 저걸 피한다고 급회전을 해서 위험을 감수할 것이냐, 그냥 밟고 지나갈 것이냐? 다행히도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할 상황은 없었고 조금 비껴가기만 하면 됐다.
에센든에서 내려 무니 폰즈까지 걸어가면 나는 도서관에 간다. 인터넷도 잘 되고 조용하고 깨끗했다. 매일 아침 도서관은 사람이 많았는데 대부분 은퇴한 노인들이거나 아직 방학중인 어린애들과 부모들이었다. 도서관 한 구석에선 아이들을 위한 동화구연과 놀이가 벌어졌고 다른 한쪽에선 신문을 읽거나 컴퓨터로 카드 게임을 하는 노인들이 앉아 있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나와 같은 카드 게임을 하는 한 할아버지를 보며 나는 저 일과가 저분에겐 삶의 낙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아무리 늙어도 컴퓨터 카드 게임을 중심으로 내 하루가 돌아가도록 인생을 놓진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나 같이 원격 근무를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았는데 컴퓨터 화면에 뜬 슬랙을 보면 알 수 있었다. 한창 일을 하다 커피를 마시러 잠깐 나가는 시간은 단언 하루의 절정이었다. 내가 마시는 커피는 맛 때문도, 카페인 때문도 아닌 걸 알았다. 커피를 마신다는 행위 혹은 문화 때문이었다. 이런 걸 두고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두루뭉술한 단어를 쓰는구나 싶었다. 퀸스 파크에 야외 수영장이 있단 걸 안 후로는 날을 잡아 일하던 도중 수영장을 가기도 했다. 나는 멜버른을 오면서 수영복을 두벌이나 챙겼다. 시간이 날 때마다 바다로 수영장으로 갈 생각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도 가방에 컴퓨터와 함께 수영복과 수건을 꼭 넣었다. 라이프 스타일.
아침에 오는 무니 폰즈의 도서관이 그렇게 좋았으면서도 몇 번을 반복하고 나니 어쩔 수 없는 일상이 되었고 그냥 일터에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쯤 나는 중심가로 장면을 옮겼다. 인터넷이 있는 적절한 자리를 찾는 게 중요했는데 나는 전에 다녔던 빅토리아 대학교 도서관에 갈 생각이었다. 졸업한 지 4년 후에 찾는 모교였는데 중심가에 새 건물을 하나 세웠다는 소식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지도를 보고 찾아간 새 캠퍼스는 생각보다 으리으리했다. 전에도 시내에 캠퍼스가 몇 개 있었지만 비교도 되지 않게 신식이었다. 혹시 들어가는 걸 누가 막지 않을까 걱정도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17층이나 되는 건물을 한층 한층 다 둘러보며 구경을 했다. 대부분 강의실 아니면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공용 공간이었다. 그 공간이 아주 쾌적하고 넓어서 어디에 자리를 잡고 앉아도 하루종일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을 정도로 여유로웠다. 방학이라 더 그랬다. 가끔 일본어로 재잘거리는 교환학생들이 보였다. 빅토리아 대는 방학 때마다 단기 영어 교실을 열어 일본 학생들을 받곤 했다. 일본 학생들은 얌전하고 수줍은 것 같으면서도 서너 명 무리만 지었다 하면 만만찮게 소란을 떠는 경향이 있었다.
그 무한해 보이는 건물에서 내 자리를 찾느라 꽤 고민을 했다. 완벽한 자리를 따져보다 장착한 곳은 도서관 가장 안쪽에 있는 책상이었다. 3층이라 전망은 별로였지만 통유리 밖으로 거리가 내려다보여 사람들을 구경하기에 그만이었다. 또 도서관 안에 숨겨져 있어선지 찾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나는 아직도 누군가 나보고 여기 학생이냐고 따지진 않을까 조금 불안해하고 있었는데 그럼 나는 은근히 자랑스러운 투로 졸업생이라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도 했지만 내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빅토리아 대 뿐만 아니라 멜버른 내 어느 대학교 건물을 들어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학생증을 찍어야 한다든지 하는 시스템은 아마 아무 데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자 도시 전체가 나만의 공유 사무실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아무 곳에나 들어가서 일을 해도 좋았다. 디지털 유목민이 이렇게 행복한 종족이었나? 돈 내는 사무실 같은 건 없어도 되고, 카페에서 좋은 자리를 찾느라 전전긍긍한 필요도 없고, 아무 도서관이나 대학 캠퍼스만 가면 완벽한 작업 공간이 됐고, 답답하면 주변의 공원이나 수영장에서 쉬다 와도 됐다. 또 비싼 커피를 마시며 나는 왜 커피를 마실까 밑도 끝도 없는 철학을 생각해 낼 수도 있었다.
사라는 5시에 퇴근을 했고 나는 사라와 집에 돌아가기 위해 시간에 맞춰 에센든으로 가야 했다. 집에 가는 길에 사라는 한 살 반짜리 딸 모건을 찾기 위해 어린이집에 들렀다. 어린이집에 따라 들어가는 내 기분이 그렇게 어색하고 불편할 수가 없었다. 사라는 일주일에 한 번은 어린이집에, 한 번은 절친한 친구의 부모님의 집에 모건을 맡겼다. 사라의 절친한 여자친구의 부모님은 영어로는 에스테이트 Estate라고 하는 시골 농장식 집에 살았는데 양가 부모님이 아닌 친구 부모님이 아이를 봐주는 것도 처음 들어보는 일이었다. 그 집은 수영장도 있었고 멀리 포도 농장이 보이는 풍경도 있었다. 방도 아주 많았을 것이다. 그 집에 따라 들어가는 것도 나는 멋쩍어 몸 둘 바를 몰랐다. 'My name is Jee'라고 소개를 하자 그 집 부모님은 '치? 쥐?'라며 다양한 발음을 시도했다. 내게 말을 걸 땐 부러 크고 천천히 말하는 것도 같았고 내게 직접 말하는 대신 사라를 사이에 두고 말하는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