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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훈 Mar 13. 2023

디지털 노매드의 어려움

마냥 좋지만 않은 게 당연했다.

휴가가 아닌 일을 하러 왔으니, 일은 해야 했다. 하루 중 중간중간 커피를 마시러 나가기도 하고 맛있는 브런치나 점심을 먹기도 하고 산책도 갔다 오고 했지만 어쨌든 일은 해야 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일을 하는 날이다. 아주 당연한 소리지만 나는 주 5일을 일하는 직장인이었다. 다른 나라에 와 있다 뿐이지. 특히 우리 회사는 주 40시간 근무를 칼같이 지켜야 했다.

재택근무 혹은 원격근무라는 걸 처음 해보면서 나는 전에 알지 못했던 스트레스를 깨달았다. 사람과 만나 일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을 어떻게든 남들이 볼 수 있게끔 해야 한다는 게 그중 하나였다.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적어도 뭔가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애써 티를 낼 필요가 없었지만 온라인으로만 서로의 존재를 알 수 있는 우리들에겐 슬랙에 접속해 있다는 것, 누군가 메시지를 보냈을 때 빠르게 답장한다는 것이 내가 컴퓨터에 앉아서 일을 하고 있다는 표시였다.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핸드폰으로 슬랙 메시지를 받으면 나는 금방 불안해졌다. 쉬고 있다가도 슬랙 메시지가 몇 번이 울리면 도저히 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아 빨리 자리에 돌아가야겠단 생각만 들었다. 일하는 것과 쉬는 것의 경계가 없어진단 소리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사무실이라는 공간에 있다는 것은 즉 근무였다. 거길 나오면 점심시간이라든지 퇴근이었다. 집에서는 그게 되지 않았다.

경계가 없어진다는 불안감과 스트레스만큼 큰 것은 죄책감이었다. 호주에 있단 사실만으로도 나는 내가 잘못을 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무리해서 온 건 사실이었다. 통보를 겨우 이틀 전에 줬으니까. 그러나 한편으론 어차피 재택근무하는 거 다른 나라에 와있다고 다를 게 뭐냐는 게 내 심정이었다. 문득문득 죄책감이 엄습할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한국에 있든, 호주에 있든, 다 온라인으로 하는 일인데. 그럼에도 사람들은 내가 '휴가지'에서 일하고 있단 인상을 받는 것 같았다. 호주에 얼마나 있냐고 묻는 HR 매니저에게 한 달이라고 하니 'long vacation'이라며 부러운 듯 말했다.

더운 날의 윌리암스타운

일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도 있었지만 한 달간 살 집을 찾는 것도 욕보는 일이었다. 인터넷으로 셰어 하우스를 알아봤을 땐 생각보다 비싸지 않고 괜찮은 집들이 많은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연락을 취하면 답장이 잘 오지 않거나 더 장기적인 룸메이트를 찾는다는 답변이 대부분이었단 것이다. 좋은 집엔 지원자가 몰리는 법이었다. 처음엔 지리, 가격, 집 상태, 룸메이트를 꼼꼼히 따지던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닥치는 대로 지원을 하는 꼴이 됐다.

그러다 집을 보기로 한 곳은 윌리암스타운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윌리암스 해변과도 가깝고 메트로로 도심까지 얼마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집주인의 소개를 보니 40대 백인 여자였는데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지금은 구직 중이고 주말엔 자기 아이들이 지내러 온다고 했다. 나쁘지 않게 지낼 수 있는 환경인 것 같았다. 윌리엄스타운엔 조금 일찍 가서 깨알같이 해수욕을 즐겼다. 시간이 되어 집주소를 찾아갔는데 윌리엄스타운은 정말이지 부티가 나는 집들이 많았다. 바닷가를 앞에 두고 살려면 여간 돈이 많이 드는 일이 아닐 터였다. 주눅이 들었다. 유복해 보이는 집들을 쭈뼛거리며 지나 목적지에 도착하니 주변의 그림 같은 집들과는 달리 잡초가 무성히 자라고 입구엔 오래된 소파가 버려진 초라한 집이었다. 전화를 하니 주인이 바로 문을 열었다. 기름진 머리에 거무튀튀한 눈가의 여자는 사진과는 전혀 달라 보였다. 어서 들어오라고 인사를 하는 그녀에게서 담배에 전 냄새가 풍겼고 누런 이가 보였다. 내가 들어올 방은 입구와 가장 가까운 곳이었는데 카펫은 불결했고 가구도 낡아빠진 싸구려였다. 주인은 침대 위에 놓인 깨끗한 리넨을 자랑스럽게 가리켰다. 다리를 절뚝거리는 여자를 따라 거실과 부엌을 가니 도저히 앉을 곳이라곤 찾을 수 없이 잡동사니가 빼곡했다. 냉장고는 어느 칸을 쓰면 된다거나 조리 도구는 무어가 있다고 말하는 그녀의 소리를 하나도 귀담아들을 수가 없었다. 말로만 듣던 호더 Hoarder라는 게 이런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책이고 운동기구고 장가방 따위가 모든 공간에 들어차 있어서 움직일 길만 겨우 터주고 있었다.

내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여자는 말했다. 'Sorry, it's a bit of mess. I didn't have time to clean. My knee's bad.'

누군가의 집에 초대되면 주인은 항상 '지저분해서 죄송하다' 등의 뻔한 말을 하곤 했지만 이 정도면 죄송한 게 아니라 내게 무릎을 꿇고 빌어야 할 정도였다.

여자는 거실에서 이어지는 정원을 보여줬는데 무지막지한 꼴은 마찬가지라 차라리 정원을 뒤엎어버리는 게 훨씬 보기가 좋을 것 같았다. 여자는 야외 테이블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테이블엔 담배꽁초가 가득한 재떨이가 있었다. 나와 앉아서 자기소개라든지 언제 들어오겠냐는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모양이었는데 나는 단 한순간도 더 있고 싶지가 않았다. 보여줘서 고맙다는 말과 나중에 연락을 주겠다는 말을 얼버무리며 허둥지둥 집을 나왔다.

정신이 쏙 빠져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뭔가 더러운 꼴을 당한 기분이었다. 버스에 앉아 있는데 여자에게서 문자가 왔다. '다른 사람들도 관심을 보이고 있으니 방이 나가기 전에 빨리 결정해 줬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다른 사람 누구? 약쟁이들?

나는 괜찮으니 다른 사람과 얘기해 보라고 답을 했다.

'I get the sense you didn't like it much?' 여자가 말했다.

뭐라고 예의 바르게 거절할까 고민하다 말했다. 'No, I did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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