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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훈 May 15. 2022

'혼자 무서웠어요. 외로웠어요.'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IDAHOBIT) 집회에 갔다.

아이다호빗(IDAHOBIT), 혹은 아이다호(IDAHO)라고 하는 기념일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18년 호주에서였다. 성소수자들을 기념하는 날은 프라이드 기간만 있는 줄 알았지 여성의 날, 물의 날처럼 국제적으로 지정된 특정 날짜가 있는 줄은 몰랐다. 1990년 5월 17일, 세계 보건기구(WHO)가 동성애를 질병으로 분류하기롤 그만둔 날을 축하하며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International Day Against Homophobia, Biphobia and Transphobia)은 만들어졌다.


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용산역을 찾았다. 내가 1년 전부터 활동을 시작한 서울퀴어문화축제위원회(Seoul Queer Culture and Festival Organization)의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 하기로 했다.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일찍 갔더니 몇몇 사람들이 간이 테이블을 펼치고 주변에 플라스틱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드래건힐 사우나와 아이파크몰 사이에 있는 공간이었다. 그 가운데 어떤 남자 혼자 무지개 깃발을 들고 서 있었다. 내가 아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카메라와 마이크와 노트북을 든 사람들이 속속 나타났다. 그들은 간이 테이블에서 'Press'라고 쓰인 목걸이를 받아갔다. 점점 집회의 모양새가 갖추어져 갈수록 주변에서 기웃거리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우리 위원회 사람들은 차가 막혀 조금 늦는다고 했다. 광장 주변을 조금 걸었다.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다 한 아이와 아버지가 하는 얘길 들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응, 사람들이 모여서 '이렇게 해주세요'하고 큰 소리로 말하는 거야."

길을 건너면 나오는 큰 공터는 이제는 코로나 검사소가 없어지고 녹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한 구석에서 초록색 조끼를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뭔가를 홍보하고 있었다. 덜컥 경계심부터 들었다. 나이대와 겉모습만 보고 뭘 하는 사람들인지 짐작하는 버릇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나이가 많을수록, 남자가 많을수록 내 몸과 마음은 저절로 방어벽을 치곤 했다. 그들을 쳐다보지 않으려 하고, 되도록 멀리 지나가려 하고, 귀를 닫으려 했다. 그들의 포스터만 힐끔 읽었다. 신천지교를 전도하는 사람들이었다.


신천지교도 동성애자 집회를 반대하러 나온 것일까? 그들은 동성애에 어떤 입장일까?

내가 너무 생각을 많이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우리 집회와 상관없이 나온 사람들일 것이다. 아이다호빗이란 날이 있다는 것도 모를 것이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기껏 집회에 나와놓고 왜 이렇게 불안해하는지. 아직도 그렇게 마음을 단련하지 못했는지. 이대로 집에 갈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광장에 외로이 깃발을 들고 서 있던 남자가 생각났다.


호주에서 성소수자 행사에 참가하는 것은 어느 때보다 재밌는 일이었다. 사회적, 정치적으로 중요하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내가 참가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재미가 있기 때문이었다. 프라이드 행진에 서는 것은 나의 존재를 드러내며 박수와 환호를 받는 시간이 됐다. 시드니 게이 레즈비언 마디그라 때 퍼레이드 행렬에 서서 춤을 췄던 적이 있었다. 다니던 회사에서 사람들을 모아 퍼레이드 팀을 만들었고 몇 주에 걸쳐 틈틈이 안무 연습을 했다. 퍼레이드 팀에 들어가는 것은 꽤 경쟁률이 높았다. 매년 그렇게 인기가 있는 행사였다. 수천 명의 관람객 사이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온 나라의 주목을 받는 시간은 이게 게이 지상낙원일까 싶을 정도로 황홀했다.


다시 집회 장소로 돌아갔다. 곧 우리 위원회 사람들도 나타났다. 사무실에서 다 같이 차를 타고 온 모양이었다. 만나자마자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오프라인으로 마지막 만난 지가 꽤 오래됐다. 우리는 바로 무지개 깃발과 마스크를 나눴다. 나는 마스크를 바꿔 쓰고 깃발도 망토처럼 몸에 둘렀다. 우리 위원회 공식 깃발도 장대에 달았다. 다른 성소수자 단체들의 장대 깃발이 하나 둘 올라가기 시작했다. 주변은 어느새 LGBT 깃발과 색으로 가득해졌다. 그 현란함에 우리 팀의 하얀색 배경 깃발이 묻혀 안타까울 정도였다. 행사장의 뒤쪽 변은 기자진으로 빽빽이 메워졌다.

행사는 성소수자 장애인들의 공연으로 시작됐다. 그들은 '혼자 무서웠어요. 외로웠어요. 이제는 영화도 보고 떡볶이도 먹어요.'라는 노래에 맞춰 춤을 췄다.

혼자라는 것만큼, 무서움과 외로움만큼 성소수자들이 똑같이 느끼는 감정이 있을까. 그리고 영화를 보고 떡볶이를 먹고 싶다는 것만큼 소박한 바람도 있을까. 나와 같은 사람들과 세상에 나가 아무것도 아닌 일들을 마음껏 해보고 싶다는 게 우리가 원하는 전부였다. 그리 하찮은 일을 어찌도 사람들은 막으려 하는지. 그게 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고 세상에 종말을 가져올 일일지.


나는 10대 때 내 성적 지향을 깨달았다. 그리고 매일 밤 잠이 들기 전 앞날을 걱정했다. 생각이 이어지다 보면 내 인생은 앞으로 고생과 거짓으로만 살아질 것임을 깨달았다. 나는 평생을 나를 꼭꼭 숨기며 살아야 할 것이다. 원치 않는 결혼을 하고 살아있는 시체처럼 삶을(혹은 죽음을) 살다 갈 것이다.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나는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기도했다. 나를 바꿔달라고. 이성애자로 변하게 해 달라고. 동성애, 이성애라는 어휘가 머릿속에 있었는지나 모르겠다. 이성애가 당연했기 때문에 두 개를 구별하는 말을 쓸 생각은 애초에 못 했던 것 같다. 그저 '남자 그만 좋아하고 여자 좋아하게 해 주세요'라고만 기도했다. 몇 년을 그랬는지 모르겠다.


바뀐 것은 모래알만큼도 없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게이였고 그 누구보다 게이였다. 성적 지향을 잴 수 있는 저울이나 스펙트럼이 있다면 나는 완전히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기도했다면, 이성애를 애타게 구했다면 저울은 조금이라도 움직여야 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게이였고 죽는 날까지 그럴 것이다.


행사 사회자는 기자들에게 더 뒤로 물러나 달라고 자꾸만 소리를 쳤다. 우리가 들어올 틈을 막고 있다고. 우리 앉을자리가 없다고. 그 말의 서브텍스트가 와닿아 가슴이 끓어오르면서도 한편으론 방송국에서 나온 사람들을 마구 부리는 대담함에 놀랐다.

언론들이 유난히 많이 찾은 것 같았다. 대통령 집무실이 이전되고 첫 집회, 그것도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까지 겹쳐서 꽤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되는 모양이었다. 저마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보도를 하겠다는 사명으로 행사장을 둘러쌓아 카메라를 세우고, 행렬을 시작한 우리를 헐레벌떡 따라잡으며 촬영을 했다. 사사로운 감정 없이 사실만을 수집해 대중에 전달하겠다는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왜 진보적 언론, 보수적 언론이 있는 것일까. 왜 게티 이미지에서 나온 사진사를 보면 마음이 놓이면서 어떤 방송국을 보면 또 몸과 마음의 벽이 올라가는 것일까.

국회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단식투쟁을 하고 있다는 사람이 발언을 했다. 거기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몇 년 전만 해도 언론들은 그들과 두 시간에 걸쳐 기자회견을 갖기도 했다고. 왜냐면 공정한 보도를 위해 양측의 의견을 모두 들어야 하니까. 그러나 오늘날엔 반대 진영을 보도하는 곳이 없다고 했다. 공정한 보도, 양측의 의견의 철칙은 어떻게 됐을까. 혐오자들에게도 혐오를 표현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논리는 이러나저러나 혐오라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삼각지를 지나 새 대통령 집무실 근처에 다다랐을 때 우리에게 소리를 빽 지르는 남자가 있었다. 경찰이 그를 막았다. 남자는 교통이 어쩌고 하며 욕을 했다. 우리는 실없이 웃을 뿐이었다. 한 사람이 뉴스에 분명 이렇게 날 것이라며 기자의 어조를 흉내 내며 말했다. "시민들은 불편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행렬이 끝나갈 때쯤엔 모두가 지쳤다. 나와 같이 걷던 위원회 동료가 말했다. "차별금지법 제정만 됐어도 내가 이 고생은 안 하는데!" 점심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밥도 먹지 못하고 집회를 하느라 기력이 다한 모양이었다.

다른 동료가 말했다. "진짜 좋은 말 할 때 제정해라 좀."

그들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 사명감과 책임감도 있었겠지만 그보다 당장 배고프고 다리 아파서 죽겠다는 불평이 먼저였다. 그 말을 툭 내던졌을 때 내 마음도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한국 사회의 막대한 차별과 혐오를 더 참을 수 없어 거리로 나왔지만 그 감정 그대로 일관하는 사람은 없었다. 행렬의 막바지에서 우리는 구호는 그만 외치고 걸그룹 노래나 부르며 춤추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간절해졌다. 그게 더 재밌기 때문이다.

그 재미였다. 춤추고 노는 재미. 그걸 즐기고 내 동료들과 어울린다는 마음으로 왔으면 됐을 걸 왜 나는 투쟁과 시위라는 부담만 잔뜩 안고 나왔을까.


재미 좀 본다고 우리의 바람과 메시지가 약해지는 건 아니었다. 언제나 정의에 불타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성소수자가 된다는 것이 그랬다. 지독한 억압이 힘들 때도 있지만 게이로 태어나서 행복하다고 느낄 때도 많았다. 꼭 축제와 행렬 때문만이 아니었다. 소수자이기 때문에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 갈 수 있었던 곳들, 배우고 느끼고 할 수 있었던 것들은 다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았다. 약자를 헤아리는 마음, 인권과 지구를 보살피기 위해 내 몫을 다해야 한다는 마음도 지금의 나 아니었다면 결코 없었을 것이다.

즐기는 모습, 성소수자가 된다는 것이 주야 장천 어둡고 우울하기만 한 건 아니라는 모습은 나 스스로에게만큼이나 보는 이들에게도 도움 되는 것이다. 아직 혼자라고 느끼고 있을 사람들에게 그렇다. 왜 자기는 남들과 같지 않을까 밑 없는 절망에 빠져 있을 사람들, 매일 밤 나를 바꿔 달라고 비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과 영화관을 가고 떡볶이를 먹고 싶다는 사람들. 행렬하는 우리를 보면 그들도 조금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게이로 태어난 게 참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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