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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으로 밥 벌어먹고 삽니다

충무로 인쇄거리의 추억

by 데이원 Day One

잡지사에서 퇴사를 하고 이번에는 취업진로 가이드를 만드는 회사를 들어갔다.

전국의 대학교를 거래처로 하고 있는 곳이라 일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곳에서는 디자인을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진짜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계속해서 디자인을 만들고 책 편집을 한다.


흔히 말하는 충무로 디자이너의 삶과 비슷했다.

작은 업체들이 모여있는 곳이라 전공자들은 오기 꺼려하는 곳이다.

이곳에 오면 회사 규모는 작은데 일은 넘쳐난다.

사무실은 당연히 비좁고 드라마에서처럼 멋진 기획회의실, 사장실이 따로 없다.

다 같이 모여서 지지고 볶으면서 일을 해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한 프로젝트에 모두 모여 아이디어 회의를 해가며 작업을 하는 환경이 되지 않는다.


거기에 명함, 스티커, 현수막 안 하는 일이 없이 다해야 한다.

당연히 인쇄소도 쫓아다녀야 하고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시스템이다.

대신 디자인 제작에 대한 모든 것을 배우기에는 딱이다.


내가 간 곳은 다행하게도 책만 만들었다.

그런데 한 사람이 한 달에 열 권씩은 만드는 것 같았다.

그때는 어느 곳이나 일이 많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특히 대학교 취업진로 관련 캠프 지원 사업이 활발했다.

우린 취업 박람회 준비에 나가는 디렉토리북도 끊임없이 만들었다.


그곳에서 편집디자인 실력이 쌓여갔다.

매일 책을 미친 듯이 만들어대니 당연한 결과였던 것 같다.

나는 책 편집디자인 작업이 재미있었다.


시키지 않아도 7시에 출근해서 미리 시안 작업도 구상해 두었다.

편집자들이 몰려오면 딱 붙어 계속되는 교정으로 표지와 레이아웃 만들 시간이 부족해서였다.

그렇게 하다 보니 생산성이 더 좋아졌다.

오전 7시부터 밤 10시까지 디자인하고 출력실에 필름 넘기면서 퇴근하고,

출근하면서 인쇄소에 필름 보내고 다시 작업하고 이런 일상을 2년 정도 한 것 같다.


같은 종류의 디자인을 계속하게 되면 아이디어가 바닥이 난다.

충전을 해줄 시간이 필요한데 그럴 여력이 없다 보니 그런 것 같다.

이제 다시 퇴사를 고민하고 있는 시점이었는데 이때 독립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진짜 밤새는 것이 싫었고 일이 많은 것도 지긋지긋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만 원하는 시간에 할 수 있을 만큼만 받아야지 생각하고 퇴사를 했다.


감사하게도 일을 더 못하겠다고 강짜를 놓던 직원에게 퇴사할 때 사장님이 거래처도 넘겨주셔서 지금까지 먹고사는 것에 문제가 없다.

사장님께는 지금도 충성하고 있다.

내 자랑 같지만 회사를 다닐 때에도 남일처럼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오해도 많이 받지만 타고난 오지랖을 발휘하여 모든 것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회사 다닐 때는 견적부터 제작비에 관한 모든 것을 궁금해하는 나를 사장님이 곱게 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정보를 빼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관심이 갔을 뿐이다.

나중에는 그런 게 아니었음이 밝혀졌지만 이런 성향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경계대상이 된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요청하지 않았는데 한다고 하는 그런 것은 자제하고 있다.

원래는 해주겠다고 말하고 다니는 것이 주특기다.

나는 해결사의 역할로 지금도 디자인으로 밥 벌어먹고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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