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희한하다. 복잡했던 마음이 제주도에 내려오니 싹 잊힌다. 일이 하나도 해결되지도 않았는데 다 해결된 기분이다. 이 새벽, 바람에 흩날리는 숙소 밖 키 큰 야자나무(?)를 보고 있자니 '아! 여기 진짜 제주도 맞네!..' 나도 모르게 마음 하나만은 편안하다.
이제부터 1년 동안 제주도에서 산다. 측근 지인들은 "딴 거 하나도 안 부럽고 네가 제일 부럽다."며 난리 난리다. 내가 생각해도 상상 속에 있는 일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겼다는 자체에 나 스스로가 대견하다. 사실 이 모든 일을 기획하고 함께 해준 아내에게 제일 고맙고 고맙다. 아내 때문에 이 모든 일이 가능했다.
집 계약, 이삿짐센터 문의, 차 탁송 이 모든 일을 아내가 진두지휘하며 혼자서 다 해냈다. 아내 왈 집순이인 내가 이 큰 결정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며 잘하고 있는 일인지 모르겠다며 아는 언니에게 이사 당일 솔직한 심정을 토로한다.
그래 어제 이사를 했다. 2년 산 정든 집을 싹 비웠다. 소파, 냉장고, 식탁, 책장이 하나씩 나갈 때마다 내 마음이 하나씩 비워졌다. 진짜 가는구나 싶었다. 물건 하나 남기지 않고 텅 빈 집을 보니 내 마음이 후련했다. 이렇게 비우고 살아야 하는데... 사는 게 뭐라고 무슨 짐이 이다지도 많은지.... 앞으론 진짜 딱 쓸 것만 가지고 살자며 텅 빈 집을 보며 마음을 잡아본다.
남향인 우리 집. 햇살이 참 따뜻하게 창을 통해 들어온다. 집이 좀 작아서 그렇지 짐을 다 비우고 나니 더 살고 싶어 진다. 비우고 나니 집의 진가가 보이는 구나. 모쪼록 어서 좋은 사람 만나서 제일 큰 걱정을 안 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두 발 쭉 펴고 잘 수 있지 않을까?
이륙하는 비행기 안에서 자긴 처음이다. 아내와 나 제주도 갈 때마다 신나고 마음이 붕 떴는데 이번은 전혀 다르다. 며칠 동안 이사 준비한다고 신경 썼던 마음이 급격한 피곤으로 바뀌었다. 비행기가 이륙도 하기 전에 잠이 스르르 몰려온다. 하늘 위인지 꿈 속인지 분간이 안 된다. 잠깐 눈을 떴는데 딸이 손을 내민다. 딸 손을 잡으니 이내 착륙을 한다.
놀러 오는 게 아니라 살려고 오니 마음가짐이 다르다. 안 보이던 우체국이 보이고 버스전용차선도 눈에 들어온다. 제주도에 놀러 온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다들 즐거워 보인다.
무엇보다 어제 탁송한 내 차를 발견하니 세상 다 든든하다. 27만 원의 호사다. 제주 올 때마다 익숙하지 않은 녀석들을 길들여야 했는데 이미 길들여진 녀석과 함께 하니 이게 뭐라고 제주도 길이 부산 집길처럼 너무 편하다. 너도 제주도 오느라고 수고 많았다. 1년 동안 함께 잘 살아보자.
이삿짐은 오늘 보냈으니 배로 내일 온다. 빈 집에서 잘 수 없어 아내가 집 근처 숙소를 하나 잡았다. 애마 타고 숙소 오는 길, 차들이 안 보이기 시작하고 오름과 구름, 바다가 보이니 기분이 업된다. 아이들도 신이 났다.
늘 건물에 가려졌던 하늘과 구름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그런지 제주도 구름은 달라도 뭔가 다르다. 구름 모양 가지고 신나게 노는 아이들이다.
"아빠, 로봇 몸통 구름이에요. 봤어요?"
"저기, 오리 구름도 있어요."
"아빠, 제가 방금 뭐 봤게요?"
떠들썩한 차 안, 아이들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내 마음도 저 구름처럼 두둥실 떠 간다.
난 숙소 체크인을 하고 짐을 풀고 아이들을 보기로 한다. 그동안 아내는 새로 살 집 입주청소를 확인하러 갔다. 청소가 8시나 되어야 끝난다고 한다. 새집이라 베이킹 아웃도 꼭 해달라고 말한다.
장 보고 온 아내랑 밥을 해 먹었다. 즉석 햇반과 김치와 불고기 쌈이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술술 넘어간다. 아낸 며칠 얼마나 신경을 많이 썼던지 오른쪽 눈 실핏줄이 터져 벌겋다. 그 와중에 밥심으로 아이들 먹이고 씻기고 재운다. 나도 모르게 쓰러져 새벽에야 지금 겨우 일어나 글을 적는다.
내일은 제주도 집 이삿짐 정리하느라 또 하루가 정신없을 것 같다. 마음 편하게 가지고 여유롭게 즐겁게 상황 상황 대처 잘 하자. 아무튼 여긴 제주도다. 난 여기서 1년 산다. 그 마음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