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2일 차 아침, 밤새 세차게 불던 바람이 멈췄다. 하늘은 온통 구름 세상이다. 구름 떼는 저 멀리 한라산을 휘감아버렸댜. 볼을 두세 번 당겨본다. 아프다. 꿈이 아닌걸 보니 여기 제주도가 확실한 모양이다.
오늘 하루, 아내와 나 역할을 나눴다. 아내는 이삿짐 담당, 난 아이들 담당이다. 아이들은 티브이 속 만화에 푹 빠져 내가 있는지도 모른다. 나만 호사를 누리고 있어 아내에게 괜히 미안하다. 그러나 1시간 후, 상황은 정말 역전되었다. 체크아웃한다고 티브이 끄는 순간 아이들이 돌변했다. 놀아달라고 야단이다. 갑자기 아내가 부러워지는 순간이다. 항상 좋을 순 없고 항상 나쁠 순 없다는 걸 아이들 키우면서 느낀다.
숨바꼭질에 술래잡기에 숙소가 아이들 발소리로 쿵쾅쿵쾅 거린다. 옷도 안 갈아입을 기세다. 옷 입고 숨바꼭질 세 판 더한다는 조건으로 겨우 옷을 갈아입혔다. 체크 아웃 남은 30분 동안 신나게 숨바꼭질을 한다. 숨은 장소를 알면서 모르는 척 하기가 더 힘들다. 휴~~~ 하하하하.
체크아웃하고 한 시간 동안 숙소 앞 산책을 했다. 어제 저녁 먹고 피곤해 자기 바빴는데 이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런 기대 없이 나간 숙소 앞 풍경이 예술이다. 특히나 여긴 올레길 한가운데다. 연신 속으로 '우와! 우와!' 감탄을 하며 기분 좋게 산책을 한다.
악근천 숲 속 길이 정글 길 같다. 제주도 바다만 예쁜 게 아니라 제주도 천도 참 특이하다. 뭔지 모를 신비함과 오묘함이 가득한 신세계다. 아이들도 제주 풍경이 마음에 드는지 흔들의자를 타고 이리 흔들 저리 흔들 한참을 논다.
1시간 기분 좋게 산책을 했다. 숙소 로비에서 엄마를 기다리다 딸아이 글자를 읽을 줄 아니 편의점을 찾았다. 이럴 땐 글자 아는 게 도움이 하나도 안 된다. 하하하. 편의점에서 고른 과자를 맛있게 먹는 아들딸 배가 고팠긴 고팠는 모양이다. 각자 고른 걸 조용히 먹으면 될 걸 항상 남의 떡이 커 보이는 모양이다. 남의 것이 탐나 보인다. 아들딸 둘이서 하는 대화가 너무 웃기다.
"누나 하나 줘!"
"싫어!"
"왜?"
"싫으니까 싫지. 그럼 너도 하나 줘."
"알았어. 여기."
"나도 여기."
물물교환에 성공한 아들내미, 오늘 고른 찍찍이 사탕은 완전 실패다. 다음엔 분명 누나가 고른 '아폴로'를 고를 게 뻔하다. 그렇게 많은데 두 개만 달랑 준 딸도 대단하다. 한참을 먹고 있으니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제주도 집 이사가 얼추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가족 상봉을 하고 점심을 중국집에서 가볍게 해결하고 1년 살 제주도 집에 왔다.
두둥!
넓다. 작은 집에 살다 큰 집에 오니 대궐이다. 각자 방이 생겼다고 신나는 아이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다. 그런데 기분 좋은 건 딱 거기까지다. 청소할 게 산더미다. 이사한다고 신발을 신어서 그런지 닦아도 닦아도 흙먼지가 계속해서 나온다. 나도 모르게 이마에서 땀이 날 정도다. 게다가 우리 딸 읽고 싶은 책 찾아달라고 하는데 어디 있는지 도통 찾아도 없다. 아들도 덩달아 건전지 찾아달라고 하는데 어디 있는지 이리 찾고 저리 찾는다.
거실 책상 배치가 마음에 또 들지 않아 자리를 옮긴다. 책상 2개 달랑 옮겼는데 허리가 다 아프다. 이삿짐 아저씨들 정말 존경스럽다. 내일 인터넷 기사님이 오신다고 아내가 컴퓨터 설치를 하라고 한다. 선 작업을 마무리하고 부팅을 했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본체에서 "삐삐삐삐삐삐삐..... 삐삐삐..." 소리가 계속해서 난다.
순간 열이 확 오른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지금껏 저장해 놓은 사진들 다 날아가는 거 아니야!!'
'미리 제대로 포장해서 흔들리지 않게 고정 좀 해 놓을 걸..'
후회해봤자 이미 늦었다. 버스 떠난 뒤에 손 흔들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아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받아도 "삐삐삐" 소리가 계속 나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그 와중에 아들딸 목욕하고 싶다고 떼를 쓰더니 기어이 옷을 벗고 이사하다 발견한 물총을 들고 욕조에 들어갔다. 물도 없는 욕조에서 물총놀이를 하고 있다. 제주도 첫날부터 감기 걸릴걸 생각하니 애가 탄다. 아이들은 신나서 놀고 있는데 컴퓨터도 안 되고 집기도 손에 안 익으니 성이 확 난다. 나도 모르게 애들한테 큰 소리를 냈다. 딱 작년 1학년 첫날 개학한 날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게 어색하고 잘 안되고 혼자 속만 탔던 때가 말이다.
집 보러 온다는 소식에 기분이 한결 나아졌지만 혼자 또 왜 그렇게 씩씩 거렸는지 후회만 가득했다. 아이들 저녁 먹이는 사이, 아내 샤워하고 한 숨 잠깐 잤다. 컴퓨터가 신경 쓰였던지 동생에게 전화하더니 "이제 소리 안 난다!"며 한 방에 고친 아내다. 역시 아내 없이 난 아무것도 못하는 모양이다. 컴퓨터를 고쳐준 아내가 세상에서 제일 고마웠다.
거실에 정리할 거리가 한가득이다. 그렇게 이전 집에서 많이 버렸는데 다시 버릴 것도 한가득이다. 이번 주 천천히 정리를 해야겠다. 내일은 아이들이 하도 심심해서 놀이터 투어를 갈 생각이다. 주변에 아이들과 놀만한 장소를 탐색해야겠다.
"처음부터 잘 되는 거는 없다고요."
우리 딸 엄지와 중지를 이용해 "딱!" 소리를 내며 숙소에서 으쓱하며 내게 말했었다.맞다. 소리가 들릴락 말락 하던 때가 엊그제 같던데 그렇게 연습하더니 이제 제법 딱 소리가 난다. 처음부터 잘 되는 게 하나도 없는 법이다. 제주도 1년 살이도 처음부터 쉽게 잘 되는 게 없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