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상이 참 그리웠다. 인터넷도 안 돼서 폰으로 이틀 동안 제주살이 글 올린다고 눈과 손이 힘들었다. 다행히 오전에 기사님께서 오셔서 인터넷도 되게 해 주시니 기어가던 애벌레에서 날개를 단 나비 기분이다. 내 손끝에서 내 생각이 줄줄줄 탁탁탁 하며 화면으로 살아 나오는 이 통쾌함과 자유로움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그 짜릿함으로 제주살이 3일 차를 기록하려고 한다.
정리할 게 많은 제주집. 오늘 하루도 아내가 혼자 집을 정리하기로 했다. 그럼 아이들은 누구 몫? 당연히 나다. 아이들을 데리고 집 주변 탐험을 하러 나간다. 탐험이란 말을 사용했는데 정말 딱 맞다. 여긴 딴 세상이다. "아빠, 여기 밀림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딸아이다. 아내의 집 구하는 안목의 탁월함을 다시 한번 느낀다. 산책하기에 이렇게 좋은 장소가 집 바로 근처에 있을 줄이야. 매일매일 아이들 유치원 보내고 아내와 걸을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다.
오늘의 임무 1. 중앙로 182번 길 따라가다 동홍천 찾기 2. 동홍천 따라가다 하이마트 찾아 공유기 사기 3. 문부공원을 찾아 놀이터에서 놀기 4. 문부공원 옆 <기적의 도서관>에서 책 보고 책 빌리기
오늘의 첫 임무는 동홍천 찾기다. 네*버 지도를 켜니 화살표 방향으로 친절하게 동서남북을 알려준다. 쉽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다.
"어, 저기 14번 김민찬 저 사람은 여기도 있네!" 대통령 선거 벽보를 보며 딸아이가 한 마디 한다. 딸아이 어린이집 친구 이름이랑 같은 사람이 부산에도 있고 제주도에도 있으니 신기한 모양이다. 조금만 걸으니 바로 동홍천이 나온다. 걷기 좋게 바닥도 푹신푹신한 초록색 매트로 깔려 있다. 아이들도 신이 났는지 씽씽이로 쌩쌩 그 길을 달린다.
동홍천 자연 그 자체가 주는 매력에 흠뻑 빠진다. 제주도 바다도 검고 노랑빛에 특이한테 여기 하천도 뭔가 신비스럽다. 길 이름 자체를 몰랐는데 목적지에 다다르니 여기 길 이름이 '동홍천 힐링길'이라고 한다.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천을 따라 보이는 나무는 몇 천년의 옛 기품과 신비함이 느껴지고, 아주 깊게 파인 천 아래의 바위 형체들도 뭔가 신비로운 괴물이 살 것 같은 느낌을 주게 한다. 물이 말라 있지만 않았다면, 쓰레기를 버리지 않았다면, 콘크리트 흔적이 보이지 않았더라면, 더 멋진 자연유산이 되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들며 이 길을 걷는다.
두 번째 임무는 공유기 사기다. 동홍천을 따라 쭉 내려왔는데 저 멀리 하*마트가 보인다. 반갑다. 잘 찾아왔다. 이전 집은 와이파이가 있어 따로 공유기가 필요 없었는데 제주집은 집안에 와이파이가 안 되니 되게 불편하다. 전에 임시로 사용한 공유기는 기사님이 보시더니 고장이 났다고 한다. 아이들이 왜 저기 가냐고 또 묻는다. "너희들 노트북 보게 해 주려고 가니 중요해요? 안 중요해요?"라고 물으니 꼭 가야 된다고 한다. 하하하하하. 친절하고 잘 생긴 점원 분이 도와주셔서 공유기 사는 데 성공했다.
세 번째 임무는 <문부공원>에 가서 놀이터에서 놀고, 바로 붙어 있는 <기적의 도서관>에서 책 보는 일이다. 아이들 입장에서 거리가 꽤 되니 다리 아프다고 목마르다고 몇 번이나 쉬었는지 모르겠다. 공원 기운이 감도는 거리에 들어서자 살짝 놀이터가 바위 위로 보인다. "저기 놀이터 있다."라는 나의 소리에 아이들이 전속력으로 달려간다. 씽씽이를 팽개치고 놀이터로 달려갔는데 놀이터보단 운동기구에 더 관심이 많은 아이들이다. 모처럼 아이들과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운동하는 이 기분이 참 좋다.
오늘의 마지막 임무인 <기적의 도서관> 가기도 성공했다. 바로 공원 위에 있다. 도서관이 특이한 원형 모양이다. 크기는 아담한데 아이들 책이 상당이 많다. 우리 아이들 옷을 팽개치고 책 보는데 여념이 없다. 직원분들이 정말 친절하시다. 혹시나 모를까 도서관 회원등록을 하는데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알고 봤더니 부산에서 만든 '책이음' 카드가 전국 공립도서관에 다 사용이 가능하다고 하신다. 책도 2주 공짜로 5권까지 빌릴 수 있다고 하니 뭔가 마음이 부자가 된 기분이다.
오늘 모든 임무가 무사히 마쳐 마음은 부자인데 배는 거지다. 준비한 귤을 까먹어도 허기가 진다. 공원 앞에 있는 핫도그 가게에서 사 먹은 핫도그 하나가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한 입 먹고 음미하는 눈빛이 황홀하다. 손에 묻은 케첩도 아주 소중하게 빨아먹는다. 겨우 겨우 사정을 해서 아들딸 한 입씩 먹었더니 왜 이렇게 많이 먹냐고 구박만 잔뜩 받았다. 양이 안 찼는지 길가에서 땅콩과자도 사서 먹었다. 핫도그와 땅콩과자 힘으로 다시 동홍천을 거슬러 집으로 돌아왔다.
집이 깨끗해졌다. 오전 오후 내내 고생한 아내의 흔적이 보인다. 아내에게 수고했다고 한마디 하니 아내도 아이들 본다고 수고했다고 그런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하루다. 집을 다 정리하니 딸이 그런다.
"우리 집 같다. 맞지?"
그 말에 웃음이 다 나온다. 이전 집에서 가져온 물건이 다 있으니 우리 집 그대로인 모양이다. 하하하하.
나도 모르게 아내에게 이런다.
"제주도 왔는데 제주도 왔는지 잘 모르겠다!"라고...
그 말에 아내도 피식 웃는다. 제주도 왔으면 여행지도 다니고 밖에 맛집도 가고 해야 하는데 부산에 있을 때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딸아이 말처럼 집도 우리 집 같고, 아이들 놀아주는 것도 일반 주말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그래도 곧 다가올 3월이 기대가 된다. 아이들 없이 주중 내내 아내와 같이 제주를 탐험할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집도 조금씩 정리가 되어 가고, 아이들도 조금씩 제주에 적응하고 있다. 부산 집 같은 제주 집,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지만, 여긴 제주도가 확실하다. 눈 모자를 쓰고 있는 한라산이 어느 곳에 가도 저 멀리 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