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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도쌤 Mar 23. 2022

아내와 함께 걸은 올레길 8코스

제주살이 30일 차

봄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수요일 아침, 아내가 모처럼 별다방 커피가 먹고 싶다고 한다. 폰으로 검색을 하더니 올레길 8코스를 가자고 한다. 8코스 중간에 중문 별다방이 있으니 비 오는 날 예쁜 바닷길도 걷고 커피도 마시기엔 안성맞춤이다. 바로 오케이 신호를 보내고 요즘 우리의 애마가 된 제주 버스를 타고 8코스 시작점인 '월평마을'로 향한다.


버스를 탔는데 아내가 이런다.


"초록버스랑 파란 버스 차이는 뭐지?'


나도 너무 궁금했다. 아내랑 나 최근에 버스를 많이 탔는데 버스 색깔이 너무 궁금했다. 오늘은 기필코 이유를 알아보겠다는 정신으로 아내 바로 검색 모드로 들어간다. 잠시 있다 아내가 바로 알아낸다. 빨간색은 급행버스, 초록색은 지선버스(주로 읍면이나 시내버스고 다른 권역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없음), 파란색은 간선버스(시외버스 개념, 다른 권역으로 넘어감)라고 한다. 이제야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오늘 탄 버스는 파란 버스다. 초록버스보다 빨리 가니 기분이 좋아져서 아내가 이런다.


"역시 빨리 가네. 파란 버스. 초록은 진짜 천천히 가더라 아이가?"


맞다. 초록버스는 정말 거북이다. 몇 번 탔는데 2차선을 따라 정류장 하나하나 다 정차하고, 승객들 타는지 내리는지 끝까지 다 확인하고, 파란 버스 친절하게 먼저 보내주고, 정말 마음 급한 내 성격과 달리 느긋느긋 하다.

초록버스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제주 버스 기사님들 정말 친절하시고 승객 위주로 운전을 해 주시니 너무 고맙다.


아무튼, 버스 색깔 이유도 알고 '월평마을'에 도착했다. 비는 그치고 그 소중하던 우산은 가방에 매달려 요리조리 움직여 날 방해한다. 조금 걸어가니 오늘의 출발지 '월평 아왜낭목'에 도착했다. 올레길 걷는 사람들로 버스 정류장이 활기를 띤다. 8코스 시작을 기념하기 위해 동백꽃 조각상 앞에서 아내 손으로 숫자 8을 만든다. 스쟁이다. 하하하하. 


올레 8코스 초입, 아왜낭목에서


'찰칵'   


아내랑 걸으니 길동무가 생겨 너무 좋다. 인생의 동반자다. 혼자 걸을 땐 딱 1시간만 좋지 그 후엔 말동무가 없으니 심심했는데 사진도 찍어주고 이런저런 이야기하며 걸으니 시간이 저절로 간다. 갑자기 리조트 안으로 들어가라는 올레길 표시가 나온다. '여기 맞나?'하고 망설이며 가는데 '약천사'라는 절로 이어진 올레길이 나온다. 제주도에서 처음 맞이하는 절이다. 절이 오래되었지만 아주 기품이 있어 보이며 도처에 주황색 '하귤'로 가득하다. 관광객들은 추억을 남기기 위해 귤과 절과 함께 사진을 찍는데 우린 시큰둥하다. 제주도에 한 달 정도 살다 보니 감귤박물관, 길거리, 집, 그리고 관공소 곳곳에서 하귤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다. '하귤 많네' 하며 그냥 바로 패스다. 하하하하. 제주 사람 다 됐다.


약천사

 여기 8코스는 유채꽃이 유난히 많다. 노란 유채꽃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리고 드디어 바다가 보인다. 유채꽃과 함께 자주 보이는 이름 모를 하양 분홍 프로펠러 꽃들이 검은 현무암과 바다와 너무 잘 어울린다. 그림이 따로 없다. 너무 꽃 이름이 궁금해서 찾아보니 이름이 '갯무꽃'이라고 한다. 내가 아는 그 깍두기, 총각김치 만드는 무들이 곳곳에 심겨있는 건 아닐 텐데... 아무튼 무꽃이라고 한다. 이렇게 무꽃이 아름다웠단 말인가? (그런데 갑자기 진짜 무인가 싶어 찾아보니 나와 똑같은 호기심을 가진 사람이 직접 파 보았다고 한다. 근데 무 맞다. 하하하하. 근데 맛은 아무 맛이 안 난다고 한다. 하하하!)


갯무꽃, 나도 다음에 한 번 직접 무 맞는지 파 볼까?^^


조금 걸으니 '대포항'이 나온다. 화장실도 급했는데 해결을 하고, 배도 출출해져서 바다를 보며 돌의자에 앉아서 빵도 먹는다. 집에서 먹을 땐 크림만 잔뜩 있어 별로 였는데, 아름다운 자연과 아내와 함께 먹으니 크림도 빵껍질 다 너무 맛있다. 역시 걷다 출출할 때 먹는 맛이란 가히 환상의 맛이다. 아내와 나 바다를 보며 느긋하게 빵을 먹는데 이제야 우리가 인생에서 얼마나 대단한 결정(동반 육아휴직을 하고 제주 1년 살이)을 했는지 피부로 느껴진다. 다시 걷다가 길가 할머니한테 산 5,000원 치 미니 한라봉 맛새콤달콤하니 너무 맛있었다.(아이들 하원하고 까줬는데 개눈 감추듯 5개를 순식간에 다 먹었다. 하하하하.)


대포항에서 간식을 먹다.


주상절리 길을 따라 돈 안 내고 볼 수 있는 미니 주상절리도 보고, 내 몸 크기 만한 초대형 알로에(?)도 보고 드디어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중문색달해수욕장'도 저 멀리 보인다. 그런데 너무 걸었나 아내 다리에 힘이 풀리고 컨디션이 갑자기 나빠졌다. 해수욕장과 여기 근처 볼 것들(식물원, 엉덩물 계곡, 베릿내 오름 등)은 다음으로 기약을 해야겠다. 일단 뭔가를 먹고 볼 일이다. 오르막을 오르고 또 오르고 한참을 올라 찾은 'm'에서 햄버거와 콜라를 먹었는데 세상에나 햄버거 한입 한입이 다 꿀맛이고, 콜라 한 모금 마실 때마다 내 영혼과 육체가 정화되는 기분이다. 혼미했던 정신과 컨디션은 바로 돌아왔다.


주상절리길과 천제 2교 다리를 걸으며


"먹고 나니 세상이 달라 보이네!"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온다. 하하하하. 배고플 땐 아무리 멋진 풍경도 다 꽝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하하하하. 드디어 아내가 가고 싶다는 별다방에 왔다. 평일인데 역시 이곳은 언제나 사람이 많다. 하루 종일 나의 어깨를 무겁게 했던, 걸을 때는 다시는 가져오지 말아야지 했던 바로 그 책  <꽃들에게 희망을>을 꺼내서 읽는다. 어라! 이거 뭐지? 만화책 보듯 너무 빨리 넘어간다. 이미 내가 책 속 '호랑 애벌레'가 되어 남들 따라 끝이 보이지 않는 기둥을 미친 듯이 오르고 있었다.

꽃들에게 희망을, 책에 푹 빠지다.


날기를 간절히 원해야 돼.
하나의 애벌레로 사는 것을
기꺼이 포기할 만큼 간절하게
<꽃들에게 희망을>, 75쪽



10분 에 읽은 책, 이 책 속에 삶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남들이 한다고, 좋아 보인다고, 무턱대고 따라 살면 안 된다는 걸 알려준다. 인생에서 나의 고치와 나의 나비는 뭘까를 고민하게 하는 책이다. 내가 진짜 간절히 원하는 건 뭘까? 지금의 삶을 기꺼이 포기할 만 간절한 건 뭘까? 올레길 내내 내 어깨를 힘들게 한 하나의 책에 내 삶이 송두리째 바뀔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든 10분이었다.


10분 후에 집으로 가는 차가 온다고 한다. 버스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부산에서 10분이면 오래 걸린다고 다른 거 탈까 하는데..."


버스정류장에서 하는 아내 말이 맞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제주도에서 10분은 빨리 오는 거다.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 여기 제주도에선 말이다.


그런데 초록버스다. 천천히 간다. 창 밖 또 다른 세상을 바라본다. 어디를 갈지 무엇을 할지 모르겠지만 이 버스는 제 할 일을 톡톡히 해 내고 있다. 나의 할 일은 무엇인가? 나의 고치와 나의 나비는 무엇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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