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달초를 다시 왔다. 오전이라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신나게 뛰어놀고 있다. 마을 곳곳에 그려진 벽화는 오늘따라 더 예뻐 보이고, 골목 곳곳에 들어선 찻집들은 하나같이 다 예쁘다. 확실히 기억에 난다. 8년 전 이곳이 새록새록.
종달초 노는 아이들 by도도쌤
종달리 해안도로에 들어섰다. 쫙 펼쳐진 시원한 바다가 내 맘을 설레게 한다. 물속 세상이 너무 궁금한 나 내려가서 물속에 뭐가 있나 살펴보는데 스무 마리 정도 되는 숭어 떼들이 나를 보고 깜작 놀라 쌩하니 도망간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유달리 많은 1코스다. 시원하게 바닷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타는 기분도 정말 좋을 것 같다. 다음엔 꼭 자전거를 한 번 도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달리 해안도로 입구 by 도도쌤
종달리 해안도로 끝에 들어서자마자 저 멀리 노란 유채꽃과 성산이 보인다. 브라보비치라는 곳 근처인데 어디 달력 사진에 나올 것 같은 풍경이 내 눈앞에 쫙 펼쳐진다. 올레길을 걸으며 힘겹게 고생한 우리를 위한 이벤트처럼 느껴진다. 여행에서의 뜻밖의 기쁨이란 이런 순간이 아닐까 싶다. '4월의 유채꽃과 성산' 사진작가가 되어 제목까지 지어본다.
4월의 유채꽃과 성산 by 도도쌤
"1코스는 근데 뭔가 아쉽다. 저번 3코스, 5코스 걸을 땐 너무 좋았는데. 똑같은 바단데 왜 그렇지?"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런가 아니야? 아니면 여기 관광지 너무 개발되어서 그런 거 아니야?"
"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때보다 오늘은 좀 아쉽다."
확실히 이곳이 개발이 많이 되어있어 아쉽긴 아쉽다. 성산항 근처 다리를 건너는데 이곳은 마치 부산 자갈치와 영도다리를 건너는 기분이다. 왼쪽엔 배들이 가득 들어서 있고 오른쪽엔 관광객을 끌기 위한 가게들과 수리 가게들 그리고 아저씨들의 찐한 담배연기가 가득한 곳이다.
성산항구 by 도도쌤
드디어 복잡한 세상을 지나 성산일출봉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섰다. 감개가 무량하다. 10년 전쯤인가 총각 때 배 타고 성산항에 와서 조껍데기 막걸리에 소라 전복 해삼을 사 먹었던 기억이 살아 난다. 그 기분 좋은 알딸딸함에 마주했던 성산. 세상에 이런 거대하고 웅장한 곳이 있나! 들판에서 풀을 뜯고 있는 말을 바라보며 말할 수 없는 거대한 풍경에 압도되어 멍하니 서 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바로 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풍경 앞에 리조트가 떡하니 들어서서 성산의 풍경을 가로막고 있다. '휴~' 한 숨이 절로 나온다. 그때 느꼈던 웅장함이 리조트 때문에 다 날아가버렸다. 혼자서 투덜투덜거리며 리조트 사잇길을 걷는다. 그래도 반가운 건 리조트 넘어 다시 만난 성산이다. 이곳의 풍경은 역시나 발걸음을 멈추고 넋을 잃고 성산과 바다를 마음껏 쳐다보게 한다.
무꽃과 성산 by도도쌤
수요일 평일이다. 그런데 이곳 성산은 평일이 아니다. 성산일출봉을 보기 위해 온 사람들로 주차장은 차로 빼곡하다. 제주도에 와서 평일에 이렇게 여유롭게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처음 알았다. 역시 세상은 넓고 내가 우물 안에만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고정된 삶은 없다는 걸 이 사람들이 내게 알려주고 있다.
성산입구 차로 빼곡한 주차장 by 도도쌤
'햄버거 가게다!'
그렇다. 성산일출봉 앞에서 발견한 '꽃담 수제버거' 햄버거집이다. 사실 오늘 점심은 8년 전에 아내랑 맛있게 먹은 그 햄버거집에서 햄버거를 먹는 거였다. 그땐 햄버거 하나만 시켜서 너무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나 이번엔 두 개를 시켜서 먹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 햄버거 가게를 아무리 찾아도 없다. 아내 보고 여기서 먹자고 했는데 아직 배가 안 고프단다. 그리고 바로 '그 햄버거집'에서 추억을 돋으며 먹고 싶다고 한다.
'여기 먹고 쉬고 다리도 아파 그만 걸었으면 하는데...'
광치기 해변길에 들어섰는데 계속 햄버거집이 생각난다. 풍경은 너무 좋은데 배가 고프고 다리가 아프니 이 길이 별로다. 아침에 딸이 생크림만 빼먹었던 바게트 빵을 먹으니 다행히 힘이 난다. 그 힘으로 다시 광치기 해변을 걷는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이곳에 4.3 때의 말할 수 없는 슬픔이 있는지 처음 알았다. 4백여 명이나 되는 무고산 양민들이 학살된 곳이라고 하니 마음이 먹먹하다. 순간 아름답다고 생각한 풍경이 너무 슬프게 느껴진다. 1948년 9월 25일 (음력), 성산은 이때의 총성과 절규와 피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겠지. 그래서 이 슬픔을 지우려고 이곳 해안가 바위들이 더 초록빛을 띠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마음이 너무 먹먹해 뒤를 돌아보고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
4.3 표지석 by 도도쌤
1코스 종착점 광치기 해변 올레 도장을 찍는 순간 속이 후련하다. 1코스를 완주했다는 뿌듯함이 밀려온다. 그것도 잠시 다리는 아프고 배가 너무 고프다. 광치기 해변을 나오니 여긴 대로변이다. 주변에 먹을 데가 없다. 저 멀리 별다방이 보이고 큰 가게들이 보이는데 다들 흑돼지 가게다. 이 시간(1시 30분)에 차로 가득한 집 하나가 눈에 띈다. '고등어 쌈밥'집이고 1박 2일 촬영 장소라고 한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데 갈 곳이 없다. 허기와 지침을 해결하기 위해서 들어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고등어쌈밥집, 기가 막혔다. by도도쌤
기본 '고등어 쌈밥' 정식을 시켰다. 공깃밥 포함 1인분에 15,000원이다. 갓난아기랑 함께 온 부모님이 보이는데 '아! 힘드시겠다. 그런데 아기 데리고 올 정도면 꽤 맛집인가!' 싶다. 아기랑 밥 먹을 땐 정말 큰 결심하고 와야 하는 걸 이젠 알기 때문이다. "김치추가요!"하며 김치를 추가 주문하는 사람이 꽤 된다.
밑반찬이 나왔다. 배가 고파 저절로 손이 간다. 간장게장도 달달하니 맛있고, 평소 잘 못 해 먹는 미역무침도 간간하게 맛있다. 게다가 굵직굵직하게 볶은 멸치도 깔끔하니 제법 괜찮다. 이어 나온 고등어 김치찜. 그냥 먹어도 된다고는 하는데 불을 올려 한 번 더 끓인다. 고등어살만 살짝 떼서 먹었는데 신선하다.
깻잎을 한 장 꺼내 고등어살 한 점과 묵은지 김치를 올려 쌈장과 함께 싸서 먹는데 역대급이다. 배가 너무 고파 맛있는지 원래 맛있는지 아무튼 1박 2일 간판 속 호동이가 열심히 먹고 있는 게 이해가 될 정도다. 그 많던 묵은지 김치는 순간 다 사라졌다. 그제야 사람들이 왜 김치를 추가 주문(5,000원 추가)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달짝하니 입에서 거의 녹는 수준이다.
(한편, 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안타깝게 돌아가신 4.3 그분들이 생각났다. 살아 있어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다음에 아이들이랑 올 땐 고등어 쌈밥 2인분에 고등어구이, 그리고 공깃밥 두 그릇 시키면 되겠다."
맛있게 먹은 아내 아이들이랑 같이 또 오고싶다고 한다. 맞다. 나도다. 성산에서 못 먹은 햄버거가 하나도 생각이 안 날 정도였으니 말이다. 지금껏 제주도 와서 맛집에 많이 갔는데 여기가 최고다. 5점 만점에 4.9점이다. 맛있게 먹은 아내 버스정류장에서 오늘의 아쉬움을 이야기하며 서로를 이해한다.
"아까 쉬긴 쉬었어야 했는데. 햄버거 집에서. 다리가 너무 아프네. 햄버거 먹고 쉬었어도 좋았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