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낯선 곳에서 걸었던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를 때가 있다. 그때의 거리와 풍경들. 그게 뭐라고 그 순간이 뭐가 그래 좋았다고 흐뭇하게 미소가 지어진다. 정말 이런 기억도 있었나 싶은데 아무렇지 않게 걸었던 장소가 떠오르는 걸 보면 역시 걸었던 게 중요하구나, 자주 걸어야겠구나 싶다.
그래서 그런지 제주에 와서도 참 많이 걷는다. 하루에 적게는 만보, 많게는 이만보 이상을 걷는다. 지금 걷고 있는 길이 나중에 언제 불쑥 나타나 나를 웃게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루는 몸이 뻐근해서 집에 있어 봤는데 뭔가 손해 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제야 후회가 들었는지 아내와 나 이랬다.
"제주는 역시 걸어야 해! 안 걸으니까 몸이 더 찌뿌듯하다! 기분도 안 좋고!"
"맞제? 제주는 걸어야 제맛이지! 매일매일 조금씩이라도 걷자!"
그렇다. 그래서 아내와 나 동네 마실 나갈 때도 장 보러 갈 때에도 가능하면 걷는다. 걷기만 해도 이렇게 좋은데 안에 있을 이유가 없다. 제주 오기 전에 내가 제주살이 1년 한다고 그러니 제주살이 한 달 한 친구가 "힘들더라도 무조건 밖에 나와야 한다. 안 그러면 나중에 진짜 후회한다."라고 강력히 외치던 게 생각난다. 한 달 살아보니 친구 말이 이제야 실감이 간다.
잠시 눈을 감는다. 어제 걸었던 올레길 1코스가 눈앞에 그림처럼 스쳐 지나간다. 몸은 집이지만 마음은 이미 다시 올레길을 걷고 있다. 유채꽃이 피어있는 종달리 거리가 보인다. 바닷바람이 내 피부를 차갑게 훑고 지나간다. 한가롭게 바다 바위에 앉아 있었던 갈매기들이 보이고, 신나게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걷는 순간은 힘들었지만 그래서 아무 기억도 안 날 것 같았지만 눈을 감으니 어제의 기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한발 한발 내 발로 직접 걸었던 길들이 다시 살아나니 참 희한하다. 이게 바로 걷기의 매력인 모양이다. 또 몇 년 지나 일하고 있을 때 이 순간이 나도 모르게 문득 떠오르겠지 그리고 생각하겠지. '그때 참 좋았었지!' 하면서 말이다.
동네 산책도 이렇게 좋은데 서귀포 시내를 잠시 벗어난 제주 바다와 산은 더 좋다. 언제 어디서나 걸어도 사람을 묘하게 기분 좋게 한다. 어제 무리한 탓인지 아내 머리가 띵하다고 한다. 그래도 집에만 있기 아까워 집 근처 '추억의 숲길'을 한 시간 정도 걸었다. 아내 걸어서 그런지 기분이 한결 낫다. 내려오면서 나아진 기분에 이런 말도 자연스레 주고받았다.
"여기 심한 오르막도 없고 내리막도 없어서 걷기 너무 좋다!"
"맞네. 여기 매일 걸어도 좋겠다!"
"음. 나무가 많아서 밖은 햇볕 때문에 뜨거운데 여긴 그늘이라 시원하다!"
맞다. 여기 이길 참 좋다. 부모님 데려오면 참 좋을 것 같다. 근처 "치유의 숲" 산책은 다음 주 화요일 숲해설가와 함께 예약을 했다. 이곳도 기대가 된다.
추억의 숲길 '말방아' 앞에서 조용히 눈감고 있었던 때가 떠오른다. 아무도 없는 숲 속에 휘파람새가 휘이이이 휘익위익 불고 숲 속 바람이 나뭇잎을 솨솨솨 불면서 내 귓가를 간지럽히던 때가. 역시 이곳도 언젠가 일하면서 떠오르겠지.
앞으로 얼마나 더 좋은 길을 걸을지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차오른다. 걷기 좋아하는 아내와 나, 예쁜 경치를 보기 좋아하는 아내와 나. 일할 땐 서로 바빠서 잘 몰랐는데 이제야 확실히 아내를 나를 알게 된다. 걷는 것 좋아하고 예쁜 경치를 좋아해서 이곳 제주에서 지금 살고 있는 게 확실하다. 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