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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흑돼지 진짜 본 적 있나요?

제주살이 1년

by 도도쌤

제주 하면 흑돼지. 흑돼지 하면 제주가 생각날 정도로 흑돼지는 제주의 또 다른 상징물이다. 마트에 가도 일반 돼지보다 흑돼지고기가 훨씬 더 비싸고 맛있다. 그리고 거리 곳곳에 제주 흑돼지 가게가 즐비하다.


마트에서 한 번씩 고기 살 때, 가게에서 흑돼지를 먹을 때, '이거 진짜 흑돼지 맞아?'란 의심병이 불쑥 튀어나오곤 했었다. 흑돼지가 유명하면 검은 돼지가 자주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마치 거리를 지나가면 어디에나 보이는 제주 하면 떠오르는 귤처럼 말이다. 그런데 흑돼지가 당체 보이질 않는다.

흑돼지 구이 by도도쌤


'제주도에 흑돼지가 있긴 있는 거야?'


호기심이 많은 나, 궁금하면 못 참는다. 해결을 해야 마음의 안심이 놓인다. 궁금증을 얼른 해결하고 싶었다. 검색을 하니 운 좋게도 집 근처인 '휴애리 자연생활공원'에 흑돼지 사진들이 보인다. '우와! 진짜 흑돼지네. 진짜 빨리 보고 싶다!'라는 충동이 마구마구 올라왔다.


3월 초에 가고 싶었지만 4월에 가면 수국 꽃도 보면 더 좋을 것 같아 4월에 한번 가기로 아이들과 약속을 했다. 아들내미 주말만 되면 "흑돼지 보고 싶어요! 언제 가요? 꽃 이제 폈어요?"라고 할 정도였다. 4월이라 검색을 다시 한번 해보니 수국 꽃도 제법 피었다. 아내와 나 휴애리로 흑돼지를 보러 가기로 결정했다.

휴애리, 수국과 돼지 동상들 by도도쌤


일요일 아침, 흑돼지 보러 간다고 아이들도 신이 나고 덩달아 나도 신이 났다. 깜빡하고 있었는데 아내가 동물 먹이로 줄 당근을 열심히 썰고 있다. "아들 까만 돼지가 진짜 까만지 안 궁금해? 눈이 새카만지, 엉덩이가 새카만지, 꼬리는 말려있는지 안 궁금해?" 농담 식으로 얘기하니 아들딸 "하하하, 크크크"하며 소파 위에서 웃고 난리다.




'휴애리'에 왔다. 일요일 오전이라 사람이 제법 많다. 여기 입장료가 생각보다 비싸다. 어른이 13,000원. 아이가 10,000원이다. 도민 찬스를 쓰니 가격이 반값이라 마음이 한결 가볍다. 그 마음처럼 수국 꽃도 입구에 활짝 펴 있는데 내 맘이 다 설렐 정도였다. 남녀노소 불문 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은데 있다. 우리 딸 흑돼지 보러 가자며 꽃은 안중에도 없다. 느긋하게 꽃과 사진을 찍고 싶은데 흑돼지 보고 싶은 마음에 꽃은 들어오지도 않는 딸이다.


휴애리의 수국은 예뻤다. 아직 안 핀 거리의 수국이 피면 환상수국잔치가 될 것 같다. 그땐 조용히 아내랑 둘이서만 오고 싶다. by도도쌤


'흑돼지야 놀자'라는 표지판을 따라 '토굴'을 지나 곤충체험관을 지나니 저 멀리 시커먼 물체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흑돼지다."라며 딸이 먼저 뛰어간다. 짐을 내려놓고 흑돼지를 보는 순간 모든 궁금증이 한 번에 다 풀렸다. '진짜 흑돼지가 있네.' 하며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딸은 준비한 당근을 꺼내서 이미 돼지에게 주려고 하고 있다.


"아빠, 근데 이거 좀 무서워요." 한다. 내가 당근을 꺼내 주려고 하는데 나도 살짝 겁이 난다. 커다랗고 반짝반짝한 시커먼 돼지코가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니 입을 확 벌려 내 손을 혹시 물지는 않을까 겁이 난다. 용기를 내어 당근 제일 끝쪽을 살짝 잡아서 입 근처에 갔다 주니 날름 입을 벌려 당근을 먹기 시작한다. 돼지가 이렇게 당근을 좋아하는지 처음 알았다. 나의 용기에 딸도 돼지에게 당근을 주기 시작한다. 돼지들 서로 먹겠다고 머리를 연신 들이대는데 이 녀석들도 자리싸움이 치열하다.


당근을 먹는 흑돼지. 당근 주는데 살짝 아니 많이 무서웠다. by도도쌤


그런데 그런데 돼지 눈을 보고 말았다. 가까이서 먹이를 주려니 돼지 눈을 의식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돼지 눈을 그렇게 가까이 본 건 처음이었다. '이건 뭐지? 이 아련한 슬픈 느낌은 뭐지?' 싶다. 돼지에게 당근을 주고 있긴 한데 눈이 계속 신경이 쓰인다. 돼지는 열심히 먹고는 있는데 왜 이렇게 내 마음이 슬프고 아련한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흑돼지들한테 당근 주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이제야 주위가 눈에 들어온다. 흰 염소도 보이고 말이며 귀여운 토끼에 닭까지 있다. 그런데 그런데 '아뿔싸!' 저기 저기 전혀 기대하지도 않은 장면 하나가 '심쿵' 내 맘을 사로잡았다.


평화로운 어미 돼지와 아기돼지의 낮잠 by도도쌤


'아! 평화롭다! 이렇게 평화로울 수가!'


흑돼지 보고 싶었던 나의 간절함 바람이 진짜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짚풀 위에 나만큼 큰 어미 흑돼지와 아기 흑돼지 10마리 정도가 곤히 잠을 자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 풍경이 얼마나 신비스럽고 아름다운지 사진을 연신 찍는다.


당근 냄새를 맡았는지 어미돼지가 갑자기 그 육중한 몸을 일으키며 한걸을 한걸음 힘겹게 발을 디디며 내게 다가오는 게 아니겠는가. 슬슬 슬 뒤로 저절로 물러서는 나, 깊은 산속에서 엄청 큰 멧돼지를 만난 기분이었다. 정말 이렇게 만났다면 난 죽은 목숨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무서웠다. 그런데 당근 하나를 꺼내 주니 킁킁킁 거리며 날름 받아먹는다.


아기 흑돼지들. 코와 너의 멋진 속눈썹을 잊지 못하겠어. by 도도쌤


"딸, 어미 돼지 새끼 낳는다고 고생했으니까 어미돼지한테 당근 많이 줘라!"라고 하니 염소에게 먹이 주던 딸도 용기를 내서 어미돼지에게 당근을 준다. 그제야 안내표지가 눈에 들어온다. '3월 21일'에 아기돼지가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니까 20일이 지난 아기 흑돼지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거였다. '이런 행운이!' 하며 보는데 대부분이 까만색인데 진짜 중간중간 두세 마리 정도는 멧돼지 포스가 나는 갈색 바탕의 검은 줄도 보인다. 돼지의 후예는 아닌가 살짝 의심했었다. 하하하하.


어미돼지가 깨니까 아기돼지도 슬슬 엄마한테 밥 달라고 그런다. 엄마가 다시 자기 자리로 와서 털썩 앉는데 짚풀과 먼지가 풀썩 공중에 날아다닌다. 그 새를 못 참고 아기 돼지들이 엄마젖을 찾아 달려드는데 생명의 위대한 순간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딸내미 그 모습을 보고 자기도 신기한지 이런다.

아기돼지가 엄마젖을 먹다. by 도도쌤


"너무 빨리 먹는 거 아니야? 엄마 돼지 힘들겠다!"


그래 정말 엄마 돼지가 힘들어 보이는 동시에 아기돼지들이 치열하게 쿵쿵쿵 거리며 젖을 빨고 있다. 이 신비로운 순간을 보여준 돼지들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꼈다. 맛있게 엄마젖을 먹은 아기 돼지들이 하나둘 뽈뽈뽈 거리며 짚 위에서 장난치며 논다. 내가 손짓을 하며 오라고 하는데 한 마리가 오더니 두세 마리가 따라온다. 내 손을 킁킁거리는데 세상에나 아기돼지코를 실제 만져보니 생각보다 단단했다. 물컹물컹거릴 거란 상상이 싹 사라졌다. 코 느낌도 좋고 아기돼지 속눈썹 길이도 장난 아니게 길다. 하하하! 소원 성취했다.




아 맞다! 아들 얘기가 빠졌다. 용기 있게 흑돼지를 보러 오자고 한 아들내미, 흑돼지를 보는 순간 "흑돼지 무서워!' 하며 부리나케 엄마를 찾았다. 결국엔 엄마에게 업혀서 그 놀란 마음을 달래야 했다. 흑돼지 빵만 맛있게 먹는 아들이었다. 흑돼지와 수국을 다 보고 차 안에서 아들에게 "아들, 오늘 꿀돼지 직접 보니 어땠어?" 하니 "냄새났어. 무서웠어. 그런데 토끼는 귀여웠어!" 그런다. 하하하하.

휴애리의 돼지빵과 토끼들. 아들은 흑돼지는 싫고 돼지빵과 토끼만 좋다고 해. 하하하. by도도쌤


돼지 빵 먹다 흑돼지 구경하고 지나가는 젊은 청춘들의 "이렇게 귀여운데 먹을 수가 있어? 하하하하하"하는 말과 웃음이 생각난다. 돼지 눈을 본 순간 그 슬픈 아련함이 또 갑자기 떠오른다.


흑돼지가 궁금하면 여기 제주 휴애리에 흑돼지가 있으니 구경하면 된다. 마트에 있는 흑돼지 진짜 흑돼지 맞다. 모든 궁금함이 다 풀린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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