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한 구석이 뭔가 허전하고 몸이 근질근질했다. 주말 내내 아이들 놀아준다고 잘 지낸 것 같은데 몸과 마음이 허했다. 역시 이틀 동안 제대로 걷지를 못했던 게 컸다. 제주는 역시 걸어야 제 맛인가 보다. 버스 타러 가는 길 종일 걷는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101번 급행버스를 타고 '월정리'에 내렸다. 제주도에 여러 번 왔었지만은 여기 월정리는 처음이다. 어떤 곳일까 궁금해하며 월정리 해변 쪽으로 내려가는데 아내가 이런다.
"여기 확실히 다르네!"
맞다. 여기 젊은 느낌, 관광지 느낌이 물씬 풍긴다. 해변 쪽으로 더 가까이 내려가니 카페도 많고 젊은이들이 참 많다.
월정리 해변 초입 by도도쌤
큰 건물이 우뚝 공사 중인데 그 옆으로 살짝 지나니 에메랄드 바다와 하얀 백사장이 눈앞에 쫘악 펼쳐진다. "우와!" "우와" 거리며 연신 나도 모르게 사진을 찍는다. 최근에 간 함덕 코발트 물 색깔과 닮았다. 백사장 크기도 아담하니 아이들 놀기에 참 좋겠다고 느꼈다.
부산에 광안리에 온 느낌이 살짝 난다. 오른쪽은 분명히 카페 천국인데 왼쪽은 광안리 바다가 아니라 코발트색 푸른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이 바다에 취해 카페와 백사장에서 바다를 감상하러 온 사람들이 참 많다. 젊은이들은 4월 말인데도 불구하고 이미 신나게 바다에서 서핑을 즐기고 있다.마음 같아서는 나도 같이 풍덩 바다에 빠지고 싶었다. 대신 바다 풍경만 몇 장 남겼다. 하하하하.
월정리 해수욕장 풍경. 이 아름다움에 취해 다들 사진찍기 바쁘다. by도도쌤
월정리 해수욕장을 지나 행원리 쪽으로 걷는데 저 멀리 풍력발전기들이 여러 보인다. 게다가 바람까지 세차게 분다. "여기 바람이 근데 세다."라고 아내에게 말했더니 아내 "그러니까 풍력발전기들이 있지" 그런다. 바람이 센 거랑 풍력발전기를 따로따로 생각했던 나, 한참을 "맞네 맞네 하하하하하" 하며 바보같이 웃었다.
올레길 20코스가 여기 풍력 발전기로 이어져 가까이 가 봤는데 크기도 거대할 뿐만 아니라 소리까지 "우후웅 우후웅" 거리는데 살짝 무섭기까지 하다.게다가 걸으면 걸을수록 바람이 어찌나 세게 불던지 바람이 급기야 아내 모자를 날려버린다. 아내 겨우 잡아 다시 썼는데 하마터면 모자가 저 바다 위로 둥둥 떠다닐 뻔했다.
픙력발전기 소리 by도도쌤
바람이 여기 아주 세다. 그래서 풍력잘전기가 있다. 하하하 by도도쌤
마을길로 접어들었는데 제주 특유의 밭들이 쫘악 눈앞에 펼쳐진다. 검은 돌담과 초록 마늘, 뭉게뭉게 하얀 구름과 하늘 그리고 풍력발전기와 이 길이 아주 제주스럽다. 사진을 연신 찍으며 이 길을 걷는다. 걷다 지쳤을 때 보이는 박노해 작가의 '걷는 독서'의 문구들이 우리네 인생을 생각하게 만든다.
나는 나를 지나쳐왔다. 나는 삶을 지나쳐왔다.
사십 중반까지 수많은 나를 만나 왔던 나. 10대의 아등바등 공부만 했던 내 모습도 생각이 나고, 20대의 끓어오르던 열정을 가진 내 모습도 생각나고, 30대의 정착과 결혼이란 문제에 대해 심각히 고민하던 내 모습도 생각이 났다. 수많은 나를 지나쳐 온 나, 그 삶을 꿋꿋이 이겨냈기에 지금 이 순간 이 아름다운 제주 올레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나도 모르게 벅찼다. 앞으로 난 어떤 나와 어떤 삶을 지나쳐 갈 것인가?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제주도와 밭과 길 by도도쌤
좋은 동행자가 함께하면 그 어떤 길도 멀지 않은 법이다.
오늘 아내와 나 둘 다 컨디션이 안 좋다. 평소보다 말이 없이 뚜벅뚜벅 걷기만 한다. 이 문구 덕분에 이야기가 싹튼다. 아내 왈 자기 덕분에 이렇게 제주도 살이 하는 거라고 한다.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하하하하하.
여러 좋은 문구들을 보며 "언제 가장 힘들었냐?"는 질문에 아내와 나 둘 다 시험공부할 때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삶이라 아주 힘들었다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눴다. 그 길을 잘 극복한 우리, 제주도 이 길도 잘 극복할 수 있으리라 다짐하였다.
제주 풍경 by도도쌤
평대 해변이 멀리 살짝 보인다. 그리고 오늘의 점심 메뉴인 성게국수를 먹을 수 있으리란 기대로 발걸음이 빨라진다. 평대 성게 국숫집이 보인다. 그런데 입구가 뭔가 쌩하다. 사람이 줄 서 있거나 북적북적한 느낌이 나야 하는데 끝없는 사막처럼 모래 바람만 휑하니 날린다.
JJteacher 님이 소개해준 평대 해변의 평대 성게국수를 먹기 위해 이 코스를 짰는데 하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문이 닫혔다. 분명 수요일 휴점이라는 걸 알고 갔는데 가게 앞에 이런 문구가 있다.
바다 물질 가는 날. 4.24-4.29 휴무
둘 다 너무 속상해 가게 앞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바다 물질 가는 날'은 생각지도 못한 변수였다. 저 멀리 바다를 보니 해녀분들이 물질을 열심히 하고 계신다. 혹시 '저분은 아닐까?'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아내가 이어 찾은 분식집. 다시 배를 성게국수모드에서 분식 모드로 바꿨다. 튀김에 떡볶이에 맥주까지 먹을 생각으로 즐겁게 갔는데 그 집 앞도 역시 휑하다. 가게 앞에 붙은 문구를 보니 할 말이 없다.
가게에 화재가 발생하여 당분간 영업이 불가합니다.
진짜 오늘 왜 이러지 싶다. 물질하러 가셔서 문을 닫고, 화재 때문에 문이 닫히고.... 배는 고픈데 오늘 먹기 텄나 싶다. 아내가 걸어오면서 발견한 '솔정국수' 집이 마지막 희망이었는데 그것마저 무산되었다. 월요일이라 휴무란다. 도처에 예쁜 찻집만 많고 왜 밥집은 없냐고? 하하하하. 아내와 나 월요일은 이제 올레길 절대 걷지 말자고 약속했다. 하하하하.
평대해변 by도도쌤
세 번다 실패하고 뚜벅뚜벅 바닷길을 걷는데 오른편에 국숫집이 하나 보인다. 선택지가 없다. 곧바로 올라가 이 집 대표 메뉴인 돗죽 하나랑 고기국수를 하나 시켰다. 돗죽은 태어나서 처음 먹어본다. 주인아저씨께서 제주의 맛을 느껴보라고 하신다. 한 입 먹었는데 뜨겁다. 하하하하. 삼계탕 같다. 짭짤하면서도 깊은 맛이 나고 맛있다. 가격은 11,000원인데 양이 너무 작아서 너무 아쉬웠다. 고기국수도 보통 일반 국숫집에서 파는 국수랑 비슷하다. 둘 다 양이 작아서 완전 깨끗이 비웠다. 5점 만점에 4.3점 준다.
평대바당국수집, 돗죽과 고기국수 by도도쌤
밥을 먹으니 힘이 난다. 그 힘으로 세화해수욕장을 거쳐 해녀박물관까지 걸어와서 올레 20코스 종점 도장을 찍었다. 세화해수욕장은 오늘 세화 장날이라 차가 해변 근처에 쫙 주차해 너무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테트라 바이트도 있어서 더 어수선해 보였다. 오늘 해변을 3개나 만났는데 3개 중에 베스트를 뽑으라면 단연코 '월정리 해수욕장'을 뽑겠다.
올레길 20코스를 걷다. 시작점에서 월정까지는 다음에 꼭 by도도쌤
집에 간다고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다 속이 좀 출출해 빵집(제주엔 우영 베이커리)을 갔는데 거기도 월요일이라 정기휴무다. 정말 오늘 맛집이 문을 다 닫았다. 월요일은 올레길 걸으면 절대 안 된다. 식당이 다 닫았다. 하하하하하. 오늘의 교훈이다.
그래도 예쁜 바다도 보고 제주 특유의 밭 경치도 구경하고 걸으면서 인생도 생각한 시간이었다. 지금만 할 수 있는 이 가치있는 시간을 절대 허투루 쓰지 않고 소중하게 써야겠다고 다짐한 하루였다. 올레길 20코스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 고마워! 제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