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악(영천오름)에 오르다.

동네 뒷산 같은 아주 쉬운 오름

by 도도쌤

제주도는 길이 정해져 있다. 가는 길이 항상 그 길이니 보이는 곳도 항상 같다. 이상하게 남원방향으로 최근에 자주 다녀왔는데 차로 갈 때마다 보이는 오름이 하나 보인다. '저 오름은 뭐지?' 하며 지도를 얼핏 봤는데 '인정 오름'이라고 한다. 그래서 저 오름 한 번은 꼭 가봐야겠다, 고 마음먹었다.

헷갈렸던 오름들 by도도쌤


'인정 오름'을 네비에 찍으니 15분이 걸린다. 출발해서 도착할 때쯤 됐는데 뭔가 분위기가 다르다. 내가 가고 싶었던 그 오름이 전혀 아니다. 그래도 이왕 온 김에 이 오름도 한 번 올라봐, 하며 걸어가는데 길이 전혀 안 나온다. 길 끝에는 멍멍이가 짖어서 도망 나오고, 귤밭으로 올라가니 길이 있긴 한데 수풀로 우거져 있어 포기하고 내려왔다. 입구에서 여기 사는 분과 이야기를 잠시 나눴는데 여긴 개인 사유지가 많아 무덤도 많고 길이 제대로 안 돼 있다고 한다.


'인정 오름'은 쿨하게 포기하기로 '인정'한다. 하하하하하.

길은 못 찾았지만 처음으로 하얀 귤 꽃 봉오리를 보았다. by도도쌤


그럼 내가 가고 싶었던 그 오름은 뭐지? '칡오름'인가 싶어 네비 찍고 가는데 내가 가고 싶었던 오름은 왼쪽에 있고 '칡오름'은 오른쪽이다. 차를 급하게 세워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지도에서 확대해 보니 이름이 오름도 아니고 '영천악'이다. 이름을 안 것만으로도 엄청 반가웠다. 바로 차를 돌려 영천악 입구에 3분 만에 도착을 하였다.

영천악(=영천오름) 걸은 코스 by도도쌤


'어떤 오름일까?' 궁금해하며 조금 걸어가는데 바로 정상으로 올라가라는 안내표지판이 나온다. 초입은 낮은 계단과 자주색 꽃이 활짝 피어 길이 예쁘고 가기가 참 수월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끝없는 계단으로 이어지는 높은 경사길이 나온다. 그 길을 한 5분 정도 쉬지 않고 올랐더니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어라? 여기가 정상이야?' 정상에 올랐는데 표지판은 정상이라고 하는데 정상이 아니다. 주위가 나무로 둘러싸여 풍경이 하나도 안 보인다. 기지국 하나랑 명심보감 문구 여러 개와 낡은 의자 하나가 다다. 그래도 명심보감에 나오는 글귀 중에 이 문구가 참 마음에 든다.


...
마땅히 사람을 꾸짖는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꾸짖고,
자신을 용서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면,
비록 성현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근심할 것이 없다.
-명심보감-

다른 사람의 단점에는 잘 참견하고 마디씩 하면서, 그러면서 정작 자신의 잘못에는 한없이 너그러운 우리. 명심보감의 말처럼 자신의 잘못에 정정당당히 잘못했다고 인정하고, 남의 실수에 대해 관대하게 용서한다면 내 마음도 편안해지고 다른 사람도 편안해지지 않을까 생각이 든 순간이었다.

영천악 정상. 푸른 하늘과 기지국밖에 안 보인다. by도도쌤


아무튼 정상 아닌 정상을 보고 너무 실망해서 내려가는데 테크로 만든 쉼터가 하나 나온다. 그곳에서 잠시 쉬면서 한라봉도 까먹고 저 멀리 한라산을 바라보는데 그나마 위로가 된다. 그리고 내려가는 길이 올라오는 길보다 경사가 심하지 않아서 아주 수월하게 내려와 진다. 여기 정말 잠시 올라갔다 잠시 내려온 기분이다. 채 15분도 안 걸은 것 같다. 다시 올라가 주차장으로 가려니 간 곳은 싫고 해서 둘레를 한 번 걸어보기로 했다.


지금까지 안내가 잘 된 오름을 걷다가 지도 봐 가면서 길을 스스로 알아내는 길을 걸으니 느낌이 다른다. 뭔가 탐험하는 기분이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분이다. 이런 도전하는 기분 뭔가 아주 끌린다. 그 기분 탓인지 몰라도 중간중간에 뜻하지 않는 반가운 손님들을 만나게 된다.


나무전봇대 by도도쌤


첫 번째는 '나무 전봇대'다. 60년 전쯤에 사용된 전봇대라고 한다. 안내판엔 이 전봇대가 영천 사람들에겐 그 당시 희망의 빛이었고, 숨바꼭질도 하면서 아이들과 즐겁게 추억을 쌓았던 곳이라고 한다. 콘크리트 전봇대에 비해 다소 왜소하지만 추억도 담고 있는 소중한 전봇대. 확실히 삭막한 콘크리트보다 자연과 함께 어울리는 나무 전봇대가 나도 훨씬 좋다.

장수기원 나무 by도도쌤

두 번째는 '장수기원 장소'다. 여기 '구실잣밤나무'가 있는데 200년은 넘은 것으로 추정되며 신비스러운 기운이 마구 넘친다. 여기서 간절히 빌면 병 없이 오래 산다고 해서 나 가족 아는 사람 모두의 무병장수를 빌었다. 하하하하. 잠시 나무에 손을 대고 진심으로 나무와 대화하면서 한 번 더 소원을 빌었다.




사실 이 둘레길이 처음 길로 이어진다는 확신도 없이 걸어왔는데 그 처음으로 다시 되돌아왔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역시 나의 감이 맞았어!' 하며 한참을 기뻐했다.


비록 유명하지는 않지만, 걷는 동안 사람을 한 명도 마주치지 못했지만, 혼자서 노래도 마음껏 실컷 부르며 탐험을 즐긴 시간이었다. 이제는 차를 타고 남원으로 넘어갈 때 이 오름을 보면 당연히 '영천악'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내 두발로 걸어가고 둘레도 한 바퀴 돌았으니 이제는 안다고 할 수 있겠다.

둘레길 한 바퀴 돈 길과 초입 정상 오르는 길 by도도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