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몸이 찌뿌듯해서 아들이랑 목욕탕에 같이 가서 떼도 밀고 오붓하게 온탕에서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런데 목욕탕에 들어서자마자 아들이 한 말에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왜 목욕탕 가자는 말에 선뜻 알겠다고 대답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빠, 누나에겐 비밀로 하고 음료수 사 주세요!"
그래. 그렇다. 음료수라면 세상을 다 가진 양 행복한 표정을 짓는 아들은 이 세상에 있는 음료수란 음료수는 다 맛보고 싶은 모양이다. 목욕탕에 들어가자마자 제일 눈에 띄는 냉장고 속 음료수를 보고 아주 다정하게 누나 모르게 음료수를 사달라고 했던 아들이다. 딸은 모르는 아들과의 음료수 비밀 연대가 부자간에 생겨버렸다. 하하하.
여름 방학이라 아들 딸을 데리고 도서관에도 가고 물놀이장도 가고 이곳저곳 많이 돌아다니니 곳곳이 거미가 줄을 친 편의점 그물이다. 그곳에 찰싹 안 달라붙을 수가 없는 아들이다. 기어이 오늘도 도서관에서 3시간 정도 책을 보다 뭔가 지루하고 입이 심심했는지 "아빠, 음료수 사 줘요!"라고 한다.
음료수 사 달라고 하는 아들이 속으로 귀엽다. 1년 전만 해도 도서관에 10분도 있지 못하고 밖에 나가 놀자고 그렇게 투정 부리며 짜증 냈던 아들이다. 그런데 1년 사이에 도서관 좋아하는 누나 따라쟁이가 된 아들이 얼마나 대견하고 귀여운 줄 모른다. 3시간이나 집중해서 책을 보며 도서관에 있었으니보면 볼수록 신기하다. 그렇기에 아들이 한 말에 속으로는 음료수 몇 개를 사주고 싶었다.
그냥 음료수를 사 줄 수 없다. 아들에게 미션을 준다.
"아들, 왜 음료수가 먹고 싶은지 이유 5가지만 적어봐!"
이유를 적으면 왠지 아빠가 음료수를 사 줄 것 같은 말투라 벌써부터 얼굴이 싱글벙글하다. 내가 볼펜과 종이 한 장을 주니 기분 좋게 5가지 이유를 거침없이 적어 내려 가기 시작한다.
ㅡ7살 아들의 음료수가 좋은 5가지 이유ㅡ
1. 음류수가 좋아서
2. 음류수가 땡겨서
3. 음류수가 시원해서
4. 음류스가 새콤달콤해서
5. 음류수가 내 스타일이라서
ㅡ7살 아들의 음료수가 좋은 5가지 이유ㅡ
디귿, 쌍디귿, 티읕이 선대칭도형이긴 하지만 7살짜리 글씨가 이 정도면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고, 이유도 7살 수준서에서는 아주 타당하다. 평소 누나랑 어디 가고 싶은 목적지가 다를 때 서로서로 10가지 이유를 대면서 자기주장을 펼쳤던 경험이 확실히 쓰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아들 입장에서도 적는 게 이렇게 음료수를 사 줄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고, 음료수도 먹을 수 있으니 1석 2조의 효과다. 물론 내 입장에서도 아들이 글씨 쓰기 연습도 하도, 주장하는 글도 쓰면서 자기 생각을 요목조목 정리할 수 있으니 1석 2조의 효과가 있는 셈이다.
오늘도 덥다. 34도까지 올라가는 날씨다. 아들이 유치원 마치고 하원할 때 또 음료수를 사달라고 할 것 같다. 오늘 하루 아들이 유치원에서 잘 지냈으니 그 덕분에 나도 모처럼 오롯이 혼자서 여름방학을 즐겼으니 마음으로는 음료수 100개라도 사 주고 싶다. 그래도 음료수는 몸에 좋지 않으니 다음에 사주겠다고 말할 것 같다.
오늘도 아들이 음료수를 쟁취할까? 아니면 나의 건강 잔소리로 내가 음료수를 안 사줄 수 있을까? 누가 이길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