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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노보노의 놀이

신도시에서 산책하기

by 이경화

귀여운 보노보노가 돌을 들추자 그 아래 있던 벌레들이 사사삭 순식간에 흩어진다. 그걸 본 보노보노와 친구들은 좋아라고 몇 번이고 돌들을 들추며 논다. 들추고, 드러나고, 도망가고, 사라지고.


아이와 함께 이 장면을 보며, 나도 어렸을 때 저렇게 노는 걸 좋아했다는 게 떠올랐다.

"엄마도 저렇게 노는 거 진짜 좋아했어!"

"저걸 좋아했다고? 엑?"

아이는 의외라는 듯 말하고, 아빠가 돌아오자 엄마가 어렸을 때 했던 기행(?)에 대해 고자질한다. 남편 역시 뜨악한 표정으로 그게 왜 좋았냐고 묻고, 아이도 궁금한 듯 쳐다봤지만, 나는 내 기호를 설명할 길이 없다.


오늘 산책을 하다가, 풀만 무성했던 인도 옆 언덕이 말끔하게 깎여진 것을 보았다. 여름부터 가을을 지나는 동안 풀이 너무 무성해서, 뭐라도 나오거나 누군가 음침한 것을 버려두기라도 했을 것 같아 몇 발짝 떨어져 걸었었는데, 며칠 사이 말끔하게 예초가 되어 땅이 드러나 보였다. 별것은 없었다. 시원하다는 기분이었다.


살면서 한 번쯤 삭발을 해 보고 싶은 것도 이와 비슷한 마음인 것 같다. 두피에 있을 뾰루지나 흉터 같은 걸 드러내고 터뜨려 버리고 싶다. 인생의 가려진 부분을 보고 싶은 마음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냥, 가려운 부분을 정확히 찾아내 시원하게 긁고 싶은 것인지도. 정말 가려운 부분은 가려져 아무리 긁고 씻어내도 괴로움이 사라지지 않는 가여운 인생. 들추어내고 깎아내서 그 가려진 어둡고 습한 부분에 햇빛을 쪼이고 벌레를 쫓아내고 바싹 말려 다시 살아가게 하고 싶은 마음일까?


이 도시에서 나무가 베어지고 풀이 뽑힌 곳에는 어김없이 아파트나 상가 건물이 들어선다. 매일을 트럭들이 오가고, 깡깡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들어선 건물에는 비슷비슷한 모양의 창문에 온통 상호가 붙어있다. 우리가 모두 아는 상호들은 그 안이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 눈부신 콘크리트 건물들은 햇빛아래 얼굴을 당당히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바라보고 있으면 나의 생이 이대로 증발해 버릴 것을 예감하게 된다. 이렇게 아무 호기심도 일지 않는 도시는 너무하지.


그렇다면 이곳은 어떤 손길이 돌을 들추어내고 풀을 깎아 그늘을 없애고 바싹 말려버린 곳 아닌가. 그 손은 장난꾸러기의 손이 아니고, 자본주의의 손일테고, 햇빛 아래 맨몸으로 선 우리는 어쩌면 도망 다니는 벌레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저기 공사 중인 이 동네에는 작은 숲이 몇 개 남아 있다. 산책을 나서자 해도, 그늘 하나 없는, 먼지만 날리는 길을 걷게 되기 일쑤라, 나가려는 마음을 접게 되는데, 숲에 가자 마음먹으면 또 걷게 된다. 11월의 숲에는 낙엽이 가득 떨어져 길을 덮고 있었다.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불어서 마른 나뭇잎들이 스치는 소리가 숲을 채우고, 바람의 재촉에 나무들은 급하게 잎들을 떨어뜨렸다. 벌써 11월인데도 날씨가 너무 따뜻해서 몰랐다면 어서어서 할 일을 하렴, 바람이 그렇게 나무들을 깨우고 다니는 것 같았다. 올려다보니 꽤 키가 큰 나무들이다. 여기서 오래 살았겠지. 신도시라고 땅이 새로 생겨난 건 아니고, 갑작스레 도시가 되었을 뿐이니. 이 땅 위에서 나무들은 자기도 베어질까 봐 떨고 있는 건 아니고, 자연의 순리대로 낙엽을 떨어뜨려 숲을 비옥하게 만들며 계속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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