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불구불 억새를 스치며 다니던 길
초등학교 오 학년 때 피아노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엔 3학년인 동생과 다니다, 점점 같이 다니는 친구들이 늘어났다. 학교가 끝나면 네모난 학원 가방을 들고 버스를 타고 삼십 분 걸리는 시내로 가, 정류장에서 내려 신호등을 여러 번 건너서 학원에 도착한다. 학원 문을 열고 들어가 낡은 소파에 앉아 있다가 피아노방의 자리가 비면 차례대로 들어갔다. 세네 칸으로 나뉜 방 안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으면 선생님이 들어와 레슨을 한다. 피아노 선생님은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고 마르고 얼굴이 하얗고 화려한 인상이었다. 선생님의 긴 손톱이 피아노 건반을 누르면, 딱딱 소리가 피아노 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다. 피아노 학원 한쪽 방에서 살림을 하고 있어서 살림살이가 그대로 보이곤 했다. 자기 아이들을 대하는 것을 보면 무서웠는데, 내가 친구들을 많이 데리고 가서인지 내겐 대체로 친절했다.
레슨 시간이 정해진 요즘 학원과 달리, 그때 피아노 학원은 되는 대로 가서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여기서 나는 이기심을 감추지도 않고 드러냈다. 양보를 잘하는 착한 친구에게 무조건 내가 먼저 들어가겠다고 한 것이다. 친구는 순순히 그러라고 했고, 내게 불만을 얘기한 적이 없다. 떠올리면 주로 부끄럽고 씁쓸하지만, 그때 학원을 다니지 않았다면 내 생활은 훨씬 단조로웠을 것이다. 학원을 다니며 시골 소녀인 내 생활 반경이 집 주변에서 바깥으로 확장됐다.
한 번에 시내에서 집까지 가는 버스가 없어 오고 가는 길이 험난했던 것이 오히려 좋았다. 시내에서 출발한 버스가 한참을 달리다 아스팔트길로 곧장 가지 않고, 어느 마을의 다리쯤에서 꺾어져 산골 마을로 구불구불 들어간다. 버스에는 또래 아이들이 많았다. 다들 무슨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다 같이 버스 뒷자리에 앉아서 버스가 요동치는 걸 즐기다 버스 기사님께 혼나기도 했다. 나는 나뭇가지나 억새가 창문 가까이 들이칠 듯이 지나가는 것이 좋았다. 손끝에 닿도록 한껏 팔을 뻗어서 살짝 스치게 하기도 했다. 그러다 저수지 위로 노을이 지는 것을 보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가 끝나고 이미 깜깜해진 시간에 소재지에서 내리면, 아빠가 근무하시던 농협 건물의 한쪽에 불이 켜져 있고, 거기 가면 아빠가 있었다. 아빠는 혼자 있을 때도, 동료들과 함께 있을 때도 있었다. 어른들의 근무 공간에서 나는 낯을 가리며 접객용 소파에 얌전히 앉아 있고, 동생은 재밌고 솔직한 말로 어른들을 웃기기도 했다. 거기 있다가 아빠랑 같이 집에 가거나 데리러 온 엄마와 가기도 했다. 어느 날은 아무도 없어서 혼자 깜깜한 길을 서럽게 걸어간 기억도 있다.
동생과 내가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자 부모님은 큰맘 먹고 피아노를 사 주셨다.(당시 피아노는 꽤 비쌌고, 아빠는 가격을 따지지 않고 동생이 고른 피아노를 샀기에 두고두고 피아노 좀 쳐 봐라 아깝다는 소리가 나왔다) 시내에 가면 버스 정류장 근처에 음반과 악보를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 악보를 하나씩 사는 재미에 빠졌다. 체르니 30 정도에 이르자, 이제는 악보를 보고 혼자 그럭저럭 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사 모은 악보가 피아노 의자 뚜껑 아래 차곡차곡 쌓였다. 동생과 나는 서로 산 악보를 바꿔보기도 했는데, 자신이 마스터하기 전에는 절대로 악보를 빌려주지 않았다.
동생과 달리 나는 피아노를 배우면서 대회에 나간 적도 입상한 적도 없었다. 함께 다니던 친구들은 모두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는 학원을 관두었다. 다만 나는 중학교에 가서도 피아노 학원에 계속 다니려고 했다. 같이 다닐 친구도 없는 시점에 왜 혼자 꾸역꾸역 학원에 갔는지 모르겠다. 중학교는 초등학교보다 늦게 끝나 학원에 가려고 버스를 타면 이미 창밖은 깜깜했다. 깜깜한 길을 꾸역꾸역 가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아직도 나의 특기인 미련이었을까? 가겠다고 스스로 먹은 마음이었기 때문일까? 엄마가 억지로 가라고 했다면 깜깜한 먼 길을 혼자서 오가는 게 정말 싫었을 것이다. 피아노는 시작도 끝도 나였다.
중학교에 가서 학원에 다닌 기간은 한두 달 정도, 그리 오래 다니지 못했다. 그만두고 한참이 지난 어느 날,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와서 피아노 앞에 내가 배운 교재를 펼쳤다. 그런데, 피아노를 배운 적도 없는 친구가 곧장 악보만 보고 곡을 쳐내는 것이 아닌가. 그때 나는 처음 허무라는 것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내 아이 역시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 나중을 생각하면 하필 피아노를 배우는 게 쓸모없는 짓 같지만, 아이는 그만둘 생각이 없다. 시간을 보낼 요량으로 시작한 게 3학년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아이가 계속 피아노만 다니겠다고 하는 건, 익숙함 때문일 수도 있다. 부모가 선택하면, 아이는 적응도 잘해 나가는 것 같아서 내쪽에서 나중에 도움이 될 쪽으로 가이드라인을 잡아야 하는 게 아닌가 초조한 마음도 들고, 여전히 레이다를 켜고 탐색 중이다.
그러나, 좋고 쓸모 있기만 바라는 것도 욕심이고, 배움으로써 그야말로 무엇을 배워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고정관념일 것이다. 아이는 과정 속에 있다.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끝내며 자기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기를 바란다. 결과가 무엇이든 과정은 남는다. 그 끝이 깜짝 놀랄 허무일지라도, 손끝을 스친 억새의 느낌과 바람과 노을과 나를 기다려주던 불빛을 나처럼 오래오래 추억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미 결과 쪽에 있다고 생각한 나도, 마음을 추슬러 다시 과정 쪽으로 한 걸음 들여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