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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한다는 말은 너무 거창하다

엄마로서 재택 근무자가 된다는 것

by 이경화

"잘 지내셨죠. 저 이제 일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서, 혹시 사람 필요하시면 저도 고려해 주시라고 연락드렸어요."

일 년 전에 더는 못하겠다고 그만두겠다고 연락했던 담당자에게, 큰마음먹고 메시지를 남겼다. 거절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많은 고민 끝에. 그렇게 마음먹기 전에는 이제 다시 일할 수 없을 거라는 절망과 일을 포기한 것에 대한 후회와 자괴감으로 내내 괴로웠다.

담당자의 대답은 의외로 가볍고 긍정적이었다. 안 그래도 새로 시작할 프로젝트가 있는데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대답을 들었을 때 기뻤고, 한편으론 두려웠다. 다시 그 혼돈 속으로 들어가 버틸 수 있을까?


집안일과 회사일 사이에서 하루를 살아내는 것은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혼돈이다. 아침에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보면 일은 얼마 진척시키지도 못했는데 하교 시간이 다가온다. 영혼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채로 아이를 맞아 간식을 챙겨 주고 티브이를 틀어주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는다. 티브이 시청 시간이 길어질수록 죄책감이 커진다. 끼니는 돌아오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던 손으로 도마 위에서 칼질을 해야 한다. 불쑥불쑥 누구에게라도 화가 치민다. 그런데 누가 잘못했지? 늘 화풀이 대상이 되는 남편은 절대로 죄가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밤이면 미쳐 못 끝낸 회사일과 집안일이 머릿속을 맴돌고, 푹 자고 다 잘 해내고 싶다는 욕심 때문인지 잠도 쉽게 오지 않고, 이러느니 일을 더하자는 마음으로 다시 컴퓨터를 켜면 다음 날은 피로 속에서 눕지도 않지도 못하고 보내게 된다.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배달음식을 시켜 먹고, 아이를 학원에 보내고. 그렇다고 해도 일과 가정 사이를 오가는 혼돈이 많이 가벼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엄마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다음 세 가지 경우 중 하나에 해당한다.
첫째, 전일제로 일하고 아이를 마음껏 보지 못하는 경우.
둘째, 적게 벌거나 경제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아서 배우자에게 재정적으로 의존하거나 국가의 도움을 받거나 가난한 경우.
가장 흔한 세 번째는 시간제로 일하며 일과 가정 사이에서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힘들어하는 것이다.
_바바라 포어자머, 《나의 아프고 아름다운 코끼리》 중에서


엄마가 된 뒤로 나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상태를 오가고 있다. 어느 경우에도 내가 없다는 면에서는 같다. 오히려 집에서 일하면 사회적 관계는 더 약해진다. 아이 초등학교 1학년 때 나는 집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놀이터에서 모여서 노는 아이를 지켜보며 다른 엄마들과 정보를 주고받거나 브런치 모임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어떤가. 소비를 담당하는 주부의 입장에서 소비의 주요 수단인 돈벌이의 주체가 내가 아니다 보면 손가락이 오므라들다 못해 마음까지 쪼그라든다. 세상에도 나에게도 점점 더 인색해지는 내가 싫어진다.


다시 시작한다는 거창한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으로선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내가 나를 구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카톡으로 주고받는 간단한 연락이나마 내게는 사회적 연결이 되고, 다음 날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게 내게 필요한 일상의 구조를 더해 줄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에는 빨리 다 해 내려는 욕심은 내려놓고 조금만 여유 갖기, 라는 마음가짐을 장착해 보려고 한다. 잘 안 되고 힘들면 그때 쉬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만두는 것도 다시 시작하는 것도 잘못은 아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힘든 게 당연한데 뭐가 힘드냐고 비난하는 시선이다. 각자의 다름을 고려하지 않고,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규정짓는 것이다. 위의 인용한 책에서 저자는 말한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사회에서 엄마가 된다는 건 원으로 사각형을 만드는 것과 같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원하는 대로 항상 해내지 못해도 정말 괜찮다.

나는 내 야망의 크기를 모른다. 내가 어떤 때 행복한지도 잘 모르겠다. 엄마가 아닌 내가 행복할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엄마로만 살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집에서 일하기는 세계와 나 사이에서 어쩔 수 없는 타협이겠만, 혼돈 속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만이 내가 나를 알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아이가 자라는 만큼 나도 나를 더 알게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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