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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본 시간

<시 읽는 시간>을 보고

by 이경화

바깥엔 봄볕이 뜨거울 정도로 내리쬐고 꽃비가 내리는 날, 서늘한 강당에 불이 꺼지고 스크린에 영화가 시작됐다.

'나 여기 왜 있는 거지. 바깥에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잔뜩 쌓아놓고서. 래도 되나.'

낯선 형식의 영화를 보며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했다. 영화나 책을 대할 때, 내가 겪는 문제를 해결하는 작은 실마리나 위로, 희망의 메시지, 아니면 현실을 잊게 만드는 즐거움을 바란다. 그런데 스크린에서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는 이야기는 어쩌면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 같았고, 몰랐어도 좋을, 불편한 이야기 같기도 했다.

희망이 없는데 희망이 있다고 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그러나 인물들은 덤덤하게 자기 이야기를 계속했고, 시를 읽어주었고, 계속 살아갔다. 그들만의 방식과 리듬으로.


영화가 끝나고 이어진 대담에서, 감독님은 멈추고 싶어서 이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고 말했다. 시 읽는 시간이 잠깐 멈추는 시간이었다고. 거대 담론이 아닌, 작은 이야기들을 하고 싶었다고. 누군가가 겪는 고통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며, 나의 기준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리고 오늘 문득 내가 영화 속 한 인물이 되어 나온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어떤 시를 낭송할 수 있을까, 이야기를 하는 나와 시 사이에는 어떤 풍경을 넣을 수 있을까, 상상하게 됐다. 그러자 평범한 내 삶에서 평범한 내가 겪는 모자란 고통이 세상의 특별한 한 조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사람들은 시를 좋아한다

어떤 사람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이란
전부가 아닌,
전체 중에 다수가 아니라 단지 소수에 지나지 않는 일부를 뜻함.
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교에 다니는 사람들과
시인 자신들을 제외하고 나면
아마 천 명 가운데 두 명 정도에 불과할 듯.

좋아한다-
여기서 '좋아한다'는 말은 신중히 해석할 필요가 있음.
치킨 수프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럴듯한 칭찬의 말이나 푸른색을 유달리 선호하는 이들도 있으므로.
낡은 목도리에 애착을 갖기도 하고,
뭐든 제멋대로 하기를 즐기거나,
강아지를 쓰다듬는 것을 좋아할 수도 있으므로.

시를 좋아한다는 것-
여기서 '시'란 과연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여러 가지 불확실한 대답들은
이미 나왔다.

몰라. 정말 모르겠다.
마치 구조를 기다리며 난간에 매달리듯
무작정 그것을 꽉 부여잡고 있을 뿐.

_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최성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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