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아빠 관찰기록 16.

기억에도 방부제를 쓸 수 있다면.

by 요를레희요

아빠는 더위를 참 많이 탔다. 겨울에도 찬물샤워를 할 만큼 시원한 걸 좋아하셨고 아빠만큼 냉수를 맛있게 마시는 사람은 아직 본 적이 없다.


좋아하는 음료수나 아이스크림 종류도 다양했고, 유독 즐겨 찾던 것들이 있어서 우리는 그것들을 잊지 않고 있었다. 심부름을 자주 다니기도 했지만 아빠가 좋아하는 거라 우리가 자주 사가기도 했던 물건들이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누구랄 것도 없이 집에 들어가는 길엔 뭐가 필요한 게 없는지 물어보고 챙겨가는 문화가 있었다. 서로에게 필요한 걸 채워주는 재미가 우리 가족에겐 있었던 것 같다.




신장투석을 시작하고 몇 년이 지난 후부터 아빠는 추위를 많이 타기 시작했다.

늘 따뜻했던 아빠의 손발은 자주 차가웠고, 아빠는 보는 사람 짠하게 당신도 모르게 콧물을 흘리곤 해 엄마가 질색했다. 평소엔 멀쩡하다가 왜 사람만 모이면 저렇게 짠하게 콧물이 맺힌 거냐며 엄마는 억울해했다.


30년이 넘게 내가 기억해 온 아빠의 취향과 기호는 아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변하고 있었다.

더위를 타던 체질은 추위를 타게 되었고, 기력이 예전 같지 않아 날다람쥐처럼 산을 탈 수도 없게 되었으며, 그 좋아하던 냉수도 마음껏 마실 수 없게 되었다.

달라진 것이 너무나 많았다.

아빠가 유난히 좋아했던 구리볼이라는 디저트와 차디찬 냉수는 아빠가 선택하면 안 되는 것들이었고, 그렇게 각 아이템에 얽힌 아빠와의 추억들도 희미해져 갔다.


아빠 스스로 선택한 부분이 아니었기에, 나는 아빠가 현재 선택하는 것들이 정말 좋아서, 좋아하는 일아서 하는 것인지 의문을 품었다. 어쩌면 내가 오랫동안 확신했던 사실을 부정하는 상황으로부터 나 자신을 방어하려 했던 것 같다.

좋아하던 것이 싫어지고, 싫어하는 것이 좋아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데, 왜 내 기억에 대해서만은 자연스러워질 수 없었을까.




특별하진 않아도 아빠와 나 사이를 채우고 있던 수많은 소재가 있다. 사소한 먹거리부터 잊지 못할 이야기까지 그리고 그 수많은 소재에는 각각의 추억이 깃들어있다. 그래서 그 소재는 단순한 음료수나 이야기가 아닌 '기억'그 자체가 된다.


나를 아프게도, 기쁘게도, 슬프게도 하는 다양한 기억들이 있지만, 생각보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다는 게 지금은 가장 마음이 아리다. 화수분처럼 끝없이 쏟아져 나올 줄 알았던, 서랍 속 추억처럼 언제든 꺼내 볼 수 있을 줄 알았던 기억들의 다수가 이제 붙잡고 싶어도 잡히지 않고 입가에서 맴돌기만 한다.


우리가 기록을 하는 이유일까.

기록을 통해 잊고 있던 순간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자신에 대한 기록조차 흔치 않은데 타인에 대한 기록이란 게 과연 존재할까. 지나고 나면 아쉬움이 남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그나마 내 일기장 속에 남아있는 아빠의 모습은 양극화되어, 아주 좋거나 아주 나쁜 모습으로 남아있어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될 것들이랄까 ) 그래서 아빠에 대해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내 머릿속에 있는 기억들뿐이다.




올해만큼 아빠의 하루하루가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 때는 없었다. 아빠의 말과 행동, 그날의 기분까지 그 모든 것이 세밀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는 건 올해가 유일했는데, 그중 다수는 기억하고 싶지 않거나 아빠조차 잊었으면 하는 바람이 담긴 기억들이 많아서 나를 웃다가 울게 만들기도 하고,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순간들이기에 그마저도 소중히 간직하고 싶다. 다만 최근의 기억들로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자리 잡은 아빠와의 소중한 기억들이 희미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짧은 메모를 남긴다. 그 계절에 아빠와 무엇을 했는지, 어디로 떠났었는지, 그때 아빠는 몇 살이었고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천천히 되짚어본다.


애연가였던 아빠가 오랫동안 즐겨 피우던 담배가 있었다.

담배 피우는 아빠가 참 싫었는데, 우연히 그 담배를 발견하고는 그 시절 아빠 모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빠 그때 참 젊었네" 나지막이 혼잣말을 해본다.

십수 년이 훌쩍 지난 기억이 지금은 이토록 선명하지만,

이 또한 시간이 흐르면 희미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에도 방부제를 쓸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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