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사고만 아니면 괜찮아
사건, 사고만 아니면 괜찮아.
언니는 예고 없이 겪는 상황만 아니어도 다행이라며 나를 다독였다.
아빠는 우리가 준비할 수 있었고 그 과정이 있었으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그러니 우리 나이에는 사건 사고 소식만 없어도 다행이라고 생각하자고 했다.
간만에 언니와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일주일쯤 되었던 어느 날, 점심을 먹고 있던 중 언니에게서 메세지가 왔다.
사진 한 장
그것도 부서진 차.
그냥 봐도 차 사고임을 알 수 있는 직관적인 사진 한 장이었다.
지난 40년간 운전하며 단 한 번도 사고가 없었던 엄마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상대차량이 신호를 잘못 본 탓에 발생한 피할 수 없는 사고로 엄마는 총 7곳의 골절이 발생했다.
다행히 긴급수술은 피했지만, 다발성 골절로 인한 장기간의 치료는 불가피하게 되었다.
현역에서 여전히 사장님 소리를 듣는 엄마는 자신의 아픔은 뒤로하고 당장의 업장 운영을 걱정했다.
직원이 알아서 할 거라는 말에도, 평생을 비워본 적 없는 그곳을 비운다는 것은 엄마의 사전에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여행을 가도 잠자리를 가려 장기간 여행보다는 짧은 여행을 선호하던 엄마였기에 병원 생활은 당연히 불편함 투성이었다. 당장 움직이기 힘든 몸도 불편했고 수시로 드나드는 의료인들, 옆 침대의 환자, 자주 울려오는 전화까지 신경 써야 했으며, 순간순간 올라오는 통증까지 더해져 엄마에게 병원이란 잠시도 편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처음 2-3일은 엄마도 경황이 없어 분주하게 지나갔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엄마는 부쩍 화가 늘었고 내내 예민했다. 며칠만 지나면 호전될 줄 알았던 몸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엄마도 어느덧 70대에 접어들지 않았던가.
하지만 엄마 스스로를 70대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누구나 그렇듯 여전히 본인은 젊다는 착각을 했다.
(나 역시도 여전히 내가 20대라고 착각하며 사는데 이게 정신건강에는 이로울진 몰라도 현실을 마주할 때 느끼는 괴리감이 크다는 단점이 있다. 하하하)
처음 일주일은 각종 검사의 반복이었으며, 그 기간 동안 엄마의 상해증상과 병증들은 늘어만 갔다. 겹겹이 쌓이는 증상들 앞에서 엄마는 서글픈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오랫동안 자신의 의지대로 일궈온 삶이 이제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매일같이 실감하며 깊은 우울감에 빠져드는 듯했다.
그렇게 2주쯤 되었을 때, 현재의 증상을 전문적으로 관리하고 치료할 수 있는 병원으로 전원을 결정했다.
전원을 계속 미뤘던 이유는 평생의 터전이었던 일터에서 멀어지는 것을 엄마가 꺼렸기 때문이었다.
가까운 곳에 머물며 조만간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고 있었기에, 전원은 곧 그 희망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우여곡절 끝에 병원을 옮겨 세심한 보살핌 속에 치료를 시작했다.
병원 생활이 3주를 넘기자 엄마는 조급함을 조금씩 내려놓았고, 가장 큰 걱정거리였던 업장이 차질 없이 운영되는 것을 확인하며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미뤄왔던 고질병을 치료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빠를 간병하느라 정작 자신의 건강은 돌보지 못했던 10년 만의 큰 결심이었다.
수술 일정을 잡고 엄마와 대화를 나누던 중, 누가 가장 많이 생각나느냐고 묻자
뜻밖에도 엄마는,
"아빠가 젤 생각나지" 라며 눈물을 보였다.
아빠를 떠나보낸 뒤 우리 앞에서는 덤덤하게 일상을 살아내던 엄마였지만, 아빠의 부재는 누구보다 감당하기 힘든 감정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아마도 일이라는 일상 뒤로 그 두려운 감정을 계속 미루어왔던 것 같았다.
입원 후 엄마가 보였던 깊은 우울감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속에 밀려드는 아빠의 공백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 엄마에게는 얼마나 버거웠을까.
(이 글을 최초 저장한 지 벌써 2개월이 지났고 연결하여 글을 쓰고 마무리하며, 그간의 시간이 얼마나 바쁜 나날이었는지를 새삼 실감합니다. 소중한 누군가의 곁에서 일상의 고단함을 함께 나누고 있을 모든 분께 진심 어린 응원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