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속의 책임감
내가 여섯 살쯤 되었을 때, 우리 집은 서울에서 운영하던 가방 공장이 부도가 났다. 공장을 처분하고 아빠의 고향 근처인 속초로 이사했다. 공장을 처분한 값은 빚잔치를 하고, 남은 돈으로 속초에 집을 구하니 무일푼 신세가 되었다. 그래도 세 식구는 먹고살아야 했다.
부모님은 인력사무소를 전전했지만, 평생 재봉틀만 돌리던 아빠는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고성 근교의 도축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퇴근할 때마다 그 당시 잘 팔리지 않던 고기 부산물을 들고 왔다. 어떤 날은 천엽, 어떤 날은 생간, 어떤 날은 소 골수를 뼈째로 가져왔다. 다행히 엄마는 소를 키워 직접 잡아먹던 시골에서 자라 아빠가 가져온 부산물로 여러 음식을 해주셨다. 골수가 가득 든 뼈로 찜을 해주던 날, 골수의 맛을 처음 알았다. 뜨끈하게 쪄낸 찜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고, 굵은 뼛속 가득 찬 뽀얀 골수를 숟가락으로 떠먹었다. 크림 같은 식감과 고소한 감칠맛은 어린 내 입맛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내가 특수 부위를 좋아하게 된 것은 아마 그때부터일 것이다.
이렇게 뼈랑 골수를 마디마디 음미할 수 있는 음식이 잘 없어요.
다 이루어질지니 中
요즘은 골수를 따로 구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그 맛을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음식이 감자탕이다. 처음 감자탕을 먹었던 기억은 중학교 2학년 때쯤이다. 그날 나는 감자탕이라는 신세계를 만났다. 오랜 시간 고아 낸 뼈에는 부드러운 살코기가 붙어 있었고, 사이사이에 박힌 노랗고 뽀얀 골수는 야들야들했다. 관절에 붙은 근육은 부드럽지만 쫄깃하게 씹혔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었다니! 이후로 한동안 엄마를 졸라 며칠이고 감자탕만 먹었다.
속초에는 아주 유명한 감자탕집이 하나 있었다. 할○니 감자탕이라는 곳인데, 가격도 싸고 양도 넉넉했다. 요즘 말로 로컬 맛집이었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학생들이 오면, 주인 할머니는 국자에 뼈 몇 개를 담아 우리가 먹던 뚝배기에 넣어주며 많이 먹으라고 하셨다. 나 역시 그 할머니께 꽤 오래 신세를 졌다. 몇 년 뒤 문학동아리 후배가 그 할머니의 손녀였다는 것을 알고, 나는 할머니의 감자탕을 매일 먹겠다며 부러워했다. 후배는 돼지 냄새에 질렸다고 인상을 찌푸렸지만 말이다.
감자탕집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가게가 이사하고 주인이 바뀌며 감자탕집은 맛이 변했다. 여전히 맛집으로 소문났지만, 기존의 맛을 아는 나로서는 실망하여 발길을 끊었다. 다른 감자탕집도 찾아봤지만, 할머니의 기억이 강렬해 같은 맛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예전 가게가 있던 자리에 이모 할○니 감자탕이라는 가게가 생겼다. 그때의 할머니가 환생한 것처럼 맛이 똑같았다. 그 맛을 알고 있는 남편도 내 의견에 동의했고, 우리는 그곳의 단골이 되었다.
며칠 전 엄마가 전화해서 감자탕을 먹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건강을 위해 한동안 풀만 먹던 나도 감자탕이 몹시 먹고 싶어졌다. 이 주째 풀만 먹었으니 하루쯤은 나를 위해 베풀어도 된다며 스스로 합리화했다. 주말이 되자마자 단골집에서 포장해 친정집으로 달려갔다.
감자탕으로 저녁 밥상을 차리고 다들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큼직한 살코기는 발라내어 아이의 밥그릇에 올려주니 맛있다고 엄지를 올린다. 남편은 내가 상을 차리기 전부터 골수가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서 그랬는지 자기 몫의 그릇에서 골수가 나올 때마다 내 그릇에 얹어주었다. 덕분에 모자란 골수를 양껏 먹었다. 엄마는 내가 감자를 좋아하니 가장 큰 것으로 내 그릇에 넣어주었지만, 다이어트하느라 찐 감자를 한가득 먹어 질렸다며 남편의 그릇으로 양보해 주었다.
마당의 개가 아쉬워할 정도로 깨끗하게 뼈를 발라 먹고, 질긴 껍질을 벗겨내 부드러운 시래기도 모두 건져 먹었다. 뼈를 먹느라 적당히 식은 밥을 한 숟가락 퍼, 된장 베이스로 진하게 우려낸 국물에 담갔다가 입안 가득 채워 넣었다. 국물이 듬뿍 밴 밥은 입안에서 스르르 풀어진다. 그렇게 반복하다 보니 밥 한 그릇까지 비웠다. 줄어들었던 위가 다시 늘어난 것 같았다.
배가 부르니 어린 시절, 뼛속에 가득 찬 골수를 숟가락으로 긁어먹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몰랐지만, 아빠는 비위가 약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피비린내와 온갖 악취로 가득한 곳에서 일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럼에도 아빠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견뎠다. 골수의 고소한 맛은 아빠의 책임감이었다.